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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Nov 09. 2019

서른 즈음에

서른을 두 달 즈음 남기고 쓰는.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 김광석, '서른 즈음에' 中 -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를 유독 좋아했다.

서른이 되기도 한참 전에, 지금도 모를 인생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착각하며 살 무렵에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 재밌게도 어렸을 때의 쌉쌀한 맛이 덜 하다. 몇 해전에만 해도 청춘이라는 단어에 '쿵'하며 생각이 멈추고 가슴이 뛰었는데 지금은 또 그렇지도 않다. 현실의 바다에 청춘이 희석된 것일까.


최근에 초등학교 2학년 때 작성한 수행 평가지가 있었다. 2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세요. 9살의 나는 29살의 내가 타임머신을 개발한 과학자가 되어있다고 그려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든 문집도 남아있길래 들쳐봤다. 나는 역사학자(정확히는 문화재를 연구하는 사람)가 되고 싶었다. 13살의 나는 29살이 되면 문화재청에서 일하며 가열차게 문화재를 연구하고 한국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고 써놨다. 나는 29살이다.


타임머신을 만들지 못했다. 전공이 문과인 탓이겠지. 문화재를 연구하는 사람도 없다.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29살이 되어버렸다. 서른 즈음에 다다랐다. 어렸을 때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다르게 말하면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완벽한 사람. 어렸을 때 꿈을 아무런 문제 없이 성취하며, 그 분야에서 탁월하게 인정받는 사람.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아름다운 가정도 꾸리고 모두와 잘 지내는 사람. 외국어도 잘하고 규칙적이며 건강한 삶. 나는 서른 즈음에 그런 사람일 줄 알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서른 즈음에, 지금의 내 모습은 완벽과 거리가 멀다. 꿈을 성취했는지 의심되며 어떤 꿈을 가졌었는지 곱씹는다. 달을 봤던 건지 손가락을 봤던 건지 모르겠다. 탁월하게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다. 사실 제대로 시작조차 못한 상태이다. 아름다운 가정은 아직 꾸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가정이 어떤 가정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모두와 잘 지내기는커녕 있는 사람들에게도 잘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말도 쉽지 않고 삶은 불규칙적에 전혀 건강하지 않다. 서른 즈음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


서른 즈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실망스럽지는 않다. 크게 후회할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살 줄 알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잘 움직여주었으며 나름의 노력도 기울였던 것 같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남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실망스럽지는 않다. 비록 타임머신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괜찮다. 완벽한 내가 아니라 조금 찌그러지고 때가 탄 것처럼 보이지만 괜찮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괜찮다.




서른 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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