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그 유명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을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정치체제들 간의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리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역사 속의 마지막 정치 체제로 남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냉전 속에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소비에트 연방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 많은 이들은 이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승리는 정의로움의 승리였고 선함의 승리였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권선징악의 명제로 생각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등 붉은색 이념이 절대악이었으니 그 반대 편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던 자유민주주의는 곧 절대선이었으며 일종의 성역이었다. 이제 전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리리라는 믿음만이 남았다. 의심할 필요가 없는 정답이었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되고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성장가도만이 펼쳐지리라는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은 1997년 말 엄청난 외환위기를 겪으며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그리고 2007년,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먼브라더스 파산은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야기했다. 이라크 전쟁이 아무런 명분도 소득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도 이내 밝혀졌다. 아랍의 봄은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내전과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전 세계는 예전만큼의 경제성장을 구가하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양극화와 불평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 경제 여건 변화 속에 사람들의 마음은 닫혔다. 자유와 평등을 위시한 민주주의는 공허했다. 내가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고 새로운 돈벌이를 찾기도 만만치 않은 세상인데, 이주노동자, 여성, 청년, 노년 등 '다른 집단'과의 일자리 경쟁이 버겁게 느껴졌다. 모양새는 다르지만 유럽, 미국, 한국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혐오 문제들이 터졌다. 기성 정치권은 이미 포괄정당화되어 시민들에게 매력을 끌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 일부 기성 정당,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포퓰리스트 정당들은 혐오 정치를 받아들였다. 트럼프, 두테르테 등 아웃사이더들이 정치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푸틴은 국외로 눈을 돌려 전쟁까지 일으켰다.
그 사이 민주주의는 요원해져 갔다. 영국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에서 매년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 분석에 따르면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되는 국가는 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감소 추세를 보인다. 동시에 권위주의 국가도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결함이 늘고 있으며, 대놓고 권위주의 국가를 표방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민주주의의 모습을 갖췄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국가들이 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특정 대륙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민주주의 지수는 선거 절차와 다원성, 정부의 기능성, 정치 참여, 정치 문화, 시민 자유 항목의 점수를 종합한 것인데, 특이하게도 정치 참여 항목의 점수만 증가 추세에 있다. 특히 시민 자유 항목은 가장 가파르게 점수가 하락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세계 역사에서 승리한 최종적 체제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민들의 정치 참여 열망과 수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치 참여의 양상이 포퓰리즘의 옹호나 혐오 정치 등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으니 양자 간에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근거 없는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정치 참여만 다른 항목이 보이는 추이를 역행하는 것은 눈여겨 볼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그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예상과 다르게 역사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AI와 유전공학의 발달은 시민권에 도전할 것이다. 메타버스와 블록체인 기술은 정당과 선거 행위 등 기성 제도에 영향을 줄 것이다. 기후변화와 인구 붕괴는 주권 국가의 존속에 위기를 초래하고 세대 간 불평등을 야기한다. 민주주의의 미래를 고민하기에도 벅찬데, 미래의 민주주의를 새롭게 스케치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동안 알던 것과 달리 우리의 성역이 오염된 것은 아닌지, 사실은 성역이 아니었던 것인지,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과 분노, 기대와 외면이 복잡하게 섞이고 있다. 아마 이 세계가 100명으로 구성된 마을이라면, 지금 그 100명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미래와 미래의 민주주의는 각기 다른 그림일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앞장설 수는 없다. 따라잡기도 녹록지 않다. 그렇다고 방관할 수는 없다. 손에 잡히는 문제들부터 수면 위의 의제로 들어 올리고 공론화시켜 국민들의 문제의식을 키워주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주의 국가 체제가 그러하다. 이니셔티브를 가진, 입법부의 엘리트 정치인도, 행정부의 전문관료 집단도, 산업계의 유수한 기업도 아니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권력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다.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결자해지하고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힘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요구된다. 어쩌면 군부독재 시기보다도, 지금 더 강한 민주시민의식이 요구되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