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당신을 위해 내 오늘을 글로 씁니다.

2025년 2월 18일

by 르겔

1.

오랜만입니다. 당신과의 마지막 인사가 벌써 3년 전이네요. 뻔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역시나 뻔한 사실이지만 당신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미 철이 지나버린 세세한 안부까지는 서로 묻지 않기로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역시나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좋았든 아니면 나빴든 아니면 어느 편도 아니었든지 간에 이미 지나갔으니까요. 반면 좋든 아니면 나쁘든 아니면 어느 편도 아니든 간에 미래는 남아있습니다. 지난 여백이 상당히 짙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오늘의 이야기를 나누며 미래를 도모합시다. 그 편이 조금은 더 설레겠습니다.


2.

21개월 전, 나와 내 아내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했습니다. 혼자서 몸도 뒤집지 못하던 그 존재는 이제 나에게 말과 몸짓으로 부탁도 하고 반항도 하고 있습니다. 이 미지의 우주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빠르게 팽창하는 우주의 끝에 닿을 수 없듯이, 나는 평생을 헐떡거리며 우주처럼 성장하는 내 아이 뒤쫓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그 헐떡거림이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어제 보지 못했던 새로운 표현과 표정에 같이 웃음 짓고 눈물 흘립니다. 더 많이 소통하고 교감할수록 내 심장 소리가 곧 내 아이의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집니다. 드넓은 우주에 푹 잠겨 방향도 모른 채 헤엄치는 일상이지만, 나는 그 모험이 좋습니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만났지만, 이제는 내 아이의 우주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내일도 헐떡거리며 아이의 성장을 쫓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3.

주양육자의 삶을 사느라 잠시 일을 쉬는 중입니다. 그리고 몇 주 후면 10개월 동안 멀어졌던 일터로 돌아갑니다. 일을 쉬는 동안 최대한 일 또는 직장과 관련된 이슈, 지식, 가십에서 멀어지고, 직장 동료들과도 거리를 두려 노력했습니다. 가사에 집중하는 동시에 일을 하면서는 가까이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가까이하며 내 몸과 마음이 뻗어나갈 수 있는 테두리를 넓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은 잘 되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몇 년을 최전방에서 보냈으니 몸이 근질근질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조금 분하고, 그저 자연법칙인 관성이란 게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도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내 일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노라 솔직히 말하더라도 꼭 분할 이유는 없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분함은 내가 요즘 주로 하고 있는 다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에 무리하고 집착하지 말자는 다짐입니다. 주어진 순간 내 책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겠습니다만, 이전의 나 어쩌면 지금의 나 역시도 그 선을 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나와 일을 동일시한 것이죠. 내 일과 그 분야의 흥망을 나의 그것과 혼동했던 순간들을 기억합니다. 혼동으로 인해 하지 않았어도 되는 말과 행동들이 나와 다른 누군가를 괴롭게 했던 일들도 기억합니다. 일터에 돌아갔을 때, 이런 우를 범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있습니다. 과거가 반복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쪼록 노력은 해보고 싶습니다.


4.

당신은 그동안 글을 가까이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한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글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다 일을 쉬면서, 조금에 불과하지만, 다시 글과 가까워졌습니다. 내 의지로 내 재미를 위해 책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책부터 읽었습니다. 중간에 너무 도전적인 책들을 집어 들었다가 정신적으로 지쳐버려서 쉰 기간이 있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꽤 여러 권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펜과 종이로 가끔 무언가 끄적였습니다. 책 전반에 대한 나의 생각, 또는 나중에 다시 곱씹을만한 문장 따위를 기록한 마지막이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은 게 부끄럽고 아쉽고 또 아까워서 그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다시 들춰볼 일이 자주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들춰볼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왠지 뿌듯합니다. 그리고 나와 내 아이를 주제로 한 일종의 일기를 씁니다. 언젠가 먼 미래에 나의 아이가 아이를 낳는다면 혹은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어떤 계기가 있다면 넘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글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당신도 읽어볼 수 있게 이곳에도 남겨볼까 생각 중입니다.


5.

철 지난 안부를 건너뛰고 여백으로 남겨두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오늘만 해도 이렇게 복잡한데, 철이 지나버린 수많은 이야기들 중 내가 정말 들려주고 싶었던 것만을 골라 그 세세한 면까지 선명히 기억해 내어 당신에게 잘 들려줄 자신이 없음을 새삼 생각합니다. 지난 여백이 상당히 짙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자고 먼저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너무 많이 묻어두었다는 점에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참 모순적입니다. 이제 내가 도모해야 하는 미래는, 다음에 당신께 이야기를 전하는 날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리지 않도록, 아마도 당신에게 내 마음을 조금 더 할애하는 미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때마침 오늘은 우수, 눈과 얼음이 녹고 봄이 시작함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마침 절기마저도 곧 다시 이야기 나누자는 말을 하기 좋은 때인 듯합니다. 곧 다시 이야기 나누길 바라며, 그때까지 잘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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