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날만 Oct 11. 2015

뮤지컬 엘리자벳 인물 탐구

인격과 역할의 대립


 너무 우연한 기회에 운 좋게 1열 티켓을 얻은 <엘리자벳>.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비를 들여 뮤지컬 티켓을 사보았다. 낼 때는 조금 사치가 아닌가 싶었는데, 공연을 보고 난 지금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번 더 보고 싶기까지 하다.


 녹음된 음악을 들으며 상상만 해왔던 <엘리자벳>을 그것도 맨 앞자리에서 보게 되다니 감격스러웠다. 시작과 함께 루케니가 나오고, 모두가 Prolog를 부르는데 처음부터 울컥했다. 맘속으로만 그려왔던 무대가 눈 앞에서 실제로 펼쳐지고 있다니 벅찼다.


2015년 7월 28일. 들어가기 전, 포토존에서부터 너무 설레였다.


 1열에 앉으면 코앞에서 악기 소리가 들려온다. 보는 내내 고개를 치켜들어야 하는 것과, 배우들의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소한 아쉬움을 제외하 최고의 자리였다. 눈썹의 각도부터 눈물자국, 화장의 색깔, 청바지의 와싱, 레이스의 무늬까지 다 보인다. 인상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아래는 평소에 그리고 공연장에서 엘리자벳을 감상하면서 등장인물들을 탐구한 것이다.




I.            루이지 루케니

 루이지 루케니는 작품의 해설가이자 주인공을 살해한 인물이다. 그는 '죽음'만큼이나 엘리자벳에게 집착했으며 극 내부의 코믹한 요소를 담당한다. 하지만 그가 자아내는 웃음은 풍자적이다. 이는 그의 솔로곡인 <Milch>와 <Kitsch>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Milch(우유)>는 서민들의 고통과 그것에 깊이 공감하는 루케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유가 없는 것이 고충이라니, 사소하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이 하얀 액체에는 ‘아이’라는 커다란 연관이 얽혀 있다. 아이에게 줄 우유가 없음은 미래의 빈곤을 암시한다. 또한 본인보다도 소중한 애착 대상인 자식에게 피해가 되므로, 황실에 대한 불만은 원망스러운 인내에서 멈추지 않고 분노로 치닫는다. 서민들은 당장 먹일 것이 없어 자식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엘리자벳이 그 우유로 목욕이나 하고 있다니, 루케니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엘리자벳의 고민과 슬픔은 저급(‘키치’)하기 짝이 없다.


 그녀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서민의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허위적이다. 엘리자벳의 번뇌는 생존이 보장된 상태에서의 안일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기념품(키치)이나 되어 싸게 팔릴 가식적인 우울에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은 루케니에게 증오와 조롱의 이유가 된다. <Kitsch>에서는 관객석까지 침범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관철한다.


 마지막에 그는 자살이란 기이한 선택을 한다. 실로, 증오는 무한한 관심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애정이다. 그는 엘리자벳을 가까이에서 오래 간 지켜보았다. 기나긴 관찰과 혐오는 결국 엘리자벳을 루케니의 삶에 결정적인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때문에 엘리자벳의 죽음을 스스로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까지 치명상을 입는다. 자신의 온 에너지를 쏟았던 피사체가 사라지자 그 역시도 삶에 의욕을 잃는다.




II.          ‘죽음(Der Tod)’

 ‘죽음’은 뮤지컬 <엘리자벳>을 실화의 단순한 재연이 아닌 상상력의 결과물로 만들어준다. 6마리의 검은 새를 하수인으로 거느리는 죽음은 극의 클라이막스들에 등장하며 여러 사람들을 덮친다. 그는 다양한 의미들과 친화력을 지닌다.


 프롤로그의 가사, “Alles tanzten mit dem Tod”를 끌어오겠다. Everyone dances with the Death, 죽음은 모두와 적어도 한 번은 춤을 춘다는 말. 이는 인간이라면 죽는다는 필연적 명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적어도’에 주목하여보자. ‘죽음’과의 대면은 삶의 끝자락, 단 한 순간에만 발생하지 않는다. 인생의 과정에서 우리는 살고자 하는 욕구뿐만 아니라 종종 죽고자 하는 욕구도 품는다.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는가와 무관하게, 우리는 존재의 나락을 경험할 때의 괴로움과 답답함을 ‘죽고 싶다’는 욕망으로 감지한다.


 이 때의 죽고 싶다는 욕구는 문자 그대로 삶의 정지를 가리키기보다는, 위험한 현재로부터 도피하여 평온한 세계에 안주하고픈 소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불확실한 현실로부터 달아나 확실한 안전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가? 즉 존재의 나락, 그 심연의 밑바닥은 언제 경험되는가? 바로 고독할 때이다. ‘죽음’은 각 인물들이 고독한 순간, 잠이 오지 않는 밤 어느 아이의 침대의 뒤에서, 혹은 고통스러운 성병환자의 옆으로 불쑥 등장한다.


 인간이 홀로 서야 은 진부할 정도로 당연하다. 그 명제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죽음’을 불러오지 못한다. 외적 세계와 내면의 홀로 서기가 조화를 이루느냐, 혹은 갈등을 빚느냐에 따라서 고독의 정도는 상이하다. 후자의 경우에만‘죽음’이 고개를 내민다. 자신의 존재적 본질과 세계가 마찰할 때 인간은 진정으로 고독하다.  그때, 갈등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며 평화를 약속하는 ‘죽음’이 찾아온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죽음’은 외부로부터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불러내는 것이다.  엘리자벳이 ‘죽음’을 원했다고 말한 루케니를 기억하자. 사후재판에서 살해의 동기를 묻자 루케니는 죽음과 그녀 사이의 거대한 사랑이 사건의 이유라 답한다. 엘리자벳은 고독 속에서 평온을 바랐고, 루케니는 그녀를 죽임으로써 대신 목적을 달성해준다. ‘죽음’ 자체는 이야기의 진행에 개입하지 않고 사건을 제작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시각을 뒷받침해준다. 다른 인물이 죽는 경우에도 그것은 ‘죽음’이 직접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나 타살로 인한 것이다.


 즉, ‘죽음’은 가상의 유혹자이자 모두의 내면에 숨 쉬는 매력적 어둠, 평안한 도피처가 주어질 것이란  마음속 희망이 인격화된 것이다. 그렇기에 엘리자벳이 ‘나의 주인은 나야’라고 노래할 때 ‘죽음’은 옆에서 함께 ‘너의 주인은 나야’라고 노래하고, 두 ‘나’가 겹친다. ‘죽음’은 엘리자벳의 내면 속에 있는, 평온한 완결을 지향하는 또 다른 자아이다. <Der Letzte Tanz(마지막 춤)>을 부를 때는 그저 하객이었지만 ‘죽음’은 마지막에 마침내 하얀 정장을 입고 엘리자벳과 결혼한다. 두 자아의 결합은 영구하고 확실하며 평화롭다.[1]


 한 편 극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세상의 종말’이란 말은 ‘죽음’과 일맥상통한다. 세상의 종말을 위해서는 시대적 격변도, 정치적 혼란도 필요치 않다. 나의 죽음은 곧 내게 세상의 종말이 될 수 있다. 눈으로 지각할 수 없는, 길어지는 그림자는 누군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세계 종말을 암시한다.




III.         대공비 소피

 그녀는 황실의 수호자이자 오랜 전통의 숨겨진 피해자이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 소피는 아들을 냉정하고 강인한 황제로 키우려 한다. 그녀에게 동정심이란 없고 사랑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황실의 안위를 걱정하며 엘리자벳과 충돌하는 소피를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악역인 그녀에게도 인간적인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도 황실에 들어오면서 감정을 죽이는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자아를 몰개성화시키면서까지 지켜온 황실의 권위를 잃고 싶지 않으리라 이해할 수 있다. <엘리자벳>의 멋짐은,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아도 배경 상황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사유는, 극에서 명시적으로 부과되는 위로부터의 메시지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감성을 자극한다.[2]


 나아가 그녀는 모든 수식 사항 이전에 한 아들의 어머니이다. 고부갈등은 서양에서도 피할 수 없다는 메마른 유-머를 말하려는 게아니다. 소피에게도 요제프를 황제가 아닌 아들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대의를 위해 사적인 감정을 억제하며 1차적으로 상처를 받았을 테다. 그런데 요제프는 결국 어머니가 아닌 아내 엘리자벳을 선택한다. 즉 소피는 아들로부터 자신의 희생에  보답받지 못하고 2차적으로 상처를 받는다. 냉철할 것만 같은 그녀는 사실 가슴 아픈 개인사를 지녔다.




IV.         Role과 Person의 대립

 <엘리자벳>을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가 있다면 바로 역할(Role)과 인격(Person)의 대립이다. 역할이란 비개인적(impersonal)인 의무-권리의 체계로, 외부 세계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반면에 인격은 타고난, 혹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향과 내면의 개성을 말한다.


 극에 따르면, 역할과 인격이 충돌할 때 인물은 갈등을 경험한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엘리자벳> 내 인물은 1. 역할에 자신의 인격을 수동적으로 맞추거나, 2. 인격을 수호하기 위해 역할을 능동적으로 변경한다. 역할을 보존하는 경우에는 자유를 희생당하지만 혼란을 막을 수 있다. 반면에 인격을 내세우면 외부 세계와 더욱 거세게 마찰을 빚어, 환경 생채기를 입히고 인생이 예측 가능한 영역을 벗어난다.


 예컨대 황제가 정해져 있는 역할에 따라 엘리자벳의 언니를 아내로 삼았다면 부부생활은 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이끌림에 귀 기울였기에 시작점에서 삶의 각도가 틀어졌으며, 이로 인해 여정의 후반부에서 완전히 엇나간 방향의 비탈길을 걷게 된다.


(1)   소피의 경우 본래의 인격이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어머니보다는 대공비로서의 삶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 역할을 위해 인격을 희생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2)   황제 역시도 처음엔 개성을 포기하고 소피의 명령에 복종한다. 자비와 선량함 대신에 냉정과 엄격함을 택한다. 그러나 그는 엘리자벳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랑이란 감정의 내밀한 복합체로, 의무의 계약을 파기할 만큼 강력하다. 그리하여 황제는 어머니 소피(요제프의 Role이 인격화된 것)와 아내 엘리자벳(요제프의 Person이 인격화된 것) 사이에서 내외적으로 갈등하고 선택을  강요받는다(노래 Elisabeth, auch meine Angel에서 “deine Mutter, oder mich(Your mother, or me)”). 결국 그는 역할이 아닌 인격을 택하며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린다. (뮤지컬에서는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이 인물로 가시화되어, 메시지를 강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황실에 대한 의무가 이미 각인되었으므로 아들 루돌프를 대할 때 소피를 닮은 모습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3)   황태자 루돌프 역시 역할과 인격이 충돌한다. 루돌프의 역할은 황태자로서 제국을 지키고 황제인 요제프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격은 제국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와 근대적 지식을 지향하고, 혁명과 독립을 지지한다.


 이는 그의 인격 중에서도 어른스러운 부분을 말하는 것이고, 마음의 다른 한 켠에는 어머니 엘리자벳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어린이 자아가 남아 있다. 다 큰 황태자인 그는 역할 상 제국에 비협조적인 어머니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는데도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속된 애정의 결핍, 그러나 어머니와 자신이 닮아 있다는 본능적 자각은 루돌프가 엘리자벳을 애타게 찾도록 만든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루돌프의 간절한 애정의 갈구를 외면한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순간, 다시 황실의 세력다툼에 휘말려 겨우 얻은 위태로운 자유가 깨지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루돌프의 자살을 낳지만 여기서도 역시 엘리자벳을 비난하기 어렵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고,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발생하는 갈등은 눈물샘을 자극한다.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또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


 한 편 루돌프의 경우에 아버지 요제프는 Role이 가시화된 것이고, 어머니 엘리자벳은 Person을 상징한다. 이렇게 극 <엘리자벳> 내 인물들은 서로의 역할과 인격으로서 중첩되는 관계망들을 형성한다.


(4)   마지막으로 엘리자벳 역할과 인격, 외부와 내면이 가장 격렬하게 갈등한다. 그녀의 태생적 인격은 꿈을 꾸고(Träumen) 시를 쓰는(Gedichte schreiben) 자유로운 영혼으로, ‘서커스단’과‘줄타기’로 상징화된다.[3] 반면 그녀의 결혼생활은 답답한 ‘궁전’에서 발생한다. 그곳에서 엘리자벳은 소피에게 자식마저 빼앗기고, 정세에 따라 조종되는 부자유스러운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따라서 그녀는 궁정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과정이 뮤지컬 전체에 담겨 있다.


 정신병동에서 엘리자벳이 만나는 ‘자칭 엘리자벳’ 환자는 오히려 엘리자벳과 반대로, 주어진 역할은 없는데 인격은 황후가 되기를 지향한다. 엘리자벳은 자신이 저 환자라면 매우 행복할 것이라 말한다. 이는 자신이 환자처럼 아무 역할도 없기를 바란 것이거나(역할을 인격에 맞춤), 황후의 지위에  만족스러워하길 원한 것일 테다(인격을 역할에 맞춤). 극의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어쨌거나 이는 역할과 인격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경우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1] 프로이트의 개념 중에 ‘죽음욕동(Todestrieb)’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참고하고 싶다.

[2] 황제가 창녀와 잔 뒤에, 자신이 엘리자벳에게 성병을 옮겼다는 사실에 얼마나 죄책감을 가졌을지도 역시 언급되지 않지만 짐작 가능하다.

[3] 엘리자벳의 아버지는 그런 그녀의 Person을 상징하고, 세속적인 성공에 관심 있는 어머니는 공주로서 엘리자벳의 Role을 대변해준다.


 엘리자벳과 죽음의 의상. 공연장 바깥에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별난 사람이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하여.


 우리 시대에 평범함은 마치 몰개성의 표지인 양 지양된다. 누구나 유별난 삶을 꿈꾸며 남들과 현저히 달라지길 바란다. 그러나 안전하고 뚱뚱한 줄기가 아닌, 위태롭고 가느다란 머리와 꼬리로 다가가는 순간 타인의 시선과, 시간 그리고 ‘죽음’의 더욱 빈번한 습격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유별남에는 필연적으로 고독도 딸려올 수밖에 없다. 외로워 했던 엘리자벳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물의 미학, 제나 할러웨이 사진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