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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Oct 11. 2015

물의 미학, 제나 할러웨이 사진전

2015년 7월 예술의 전당

1: Intro

 우연히 제나 할러웨이라는 수중 촬영 사진작가를 접했다. 물 속의 여자를 찍은 사진들이 참 몽환적이었다. 저녁 약속이 파토 나 갈 곳도 없겠다, 친구도 마침 시간이 괜찮겠다 싶어 바로 전시를 보러 갔다. 퓰리처에 이어 내 인생에서 두 번째 사진전이된 셈이다. 쿠쉬展처럼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의 전시를 본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이 멀리 한국에서까지 전시가 열릴 정도의 개성이 있고, 그런 실력이 생전에 인정받는다니 내심 부러웠다.


전시 티켓과 팜플렛을 나름 모으고 있다. 커버 이미지는 전시장 밖 포토월에서 찍었다.



2: 물의 미학

 제나 할러웨이는 오랜 기간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물과 친해졌다고 한다. 자신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환경 속에서 예술적인 역량을 발휘하려면 새로운 시선이 요구된다. 이미 잘 아는 대상을 작품 그 자체 혹은 배경으로 삼으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상의 프레임 안에서는 그저 낯에 익을 뿐인 뭔가를 예술 프레임으로 이행시켜야 한다. 제나에게 그 무언가는 ‘물’이었다.


 물이 단순한 다이빙 환경에서 예술을 낳는 세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중 사진만이 지니는 미학적인 특성들 때문이다. 물은 어떠한 흐름으로밖에 존재하지 않아서 고정되지 않고 바람과 사물에 따라 매 번 다르게 일렁인다. 그러므로 물의 유동은 작가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영역에 있다. 이는 의도 밖의 효과들을 낳는다.


 머리카락과 천이 어느 순간에 어떤 방향으로 휘날리는 것은 재연될 수 없다. 기포와 물결의 무정형성, 수면 가까이에서 반사되고 흔들리는 피사체의 편린 역시 계획될 수 없다. 통제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제공함으로써 물은 유일한 결과물만을 허용한다. 어떤 장면도 물속에선 동일하게 반복될 수 없다.


 빛이란 변수의 예측 불가능한 효과들 역시 수중사진의 일회성에 일조한다. 하지만 이 ‘한 번밖에 찍을 수 없음’은 휘발성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언제 보아도 감동적일 영구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 연장선 상에서, 물은 유동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피사체는 지상에서와 다른 포즈를 취하게 된다. 가만히 있어야만 안정적으로 설 수 있는 땅이 아니라, 도리어 팔다리를 휘저어야만 부력을  담보받는 물 속에서 모델은 흐름에 몸을 맡긴다. 때문에 손끝과 발끝이 우아하게 날이 선다.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제약 하에 오히려 더욱 역동적인 자세가 연출되는 것이다. 새로운 동작과 더불어 신체의 아름다움은 극대화된다.


 또한 물은 색과 질감을 자신만의 것으로, (literally) 물들인다. 지상에서의 특정한 색깔과 질감은 물 속에서 다르게 보인다. 같은 천도 물 속에 들어가면 수분을 먹고 투명해지면서 실의 결들이 사진 속에 담기게 된다. 공기와 물은 엄연히 다른 성질을 지니는 매질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땅에서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소품들과 물 사이의 친화력도 고려의 대상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은 사물이 물 속에선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가벼운 소재는 스스로 부유하려 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은 대상의 경계를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일반 사진에서는 단색의 배경 위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 이상, 피사체 바깥의 대상들로도 관심이 이어진다. 시선은 처음엔 모델을 쫓겠지만 이내 모델과 배경의 경계 사이를 맴돌며 환경의 영향에 포섭될 것이다. 하지만 물 속에서는 피사체만이 홀로 떠 있다. 빛에 따라 검기도 푸르기도 한 물은 철저한 배경이 되어 피사체와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경계 짓고, 대상의 윤곽선을 선명히 그려낸다. 대상과 환경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전자를 돋보이게 만들고, 뒤이어 후자의 특수성에 감탄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항들은 ‘예술적 물’이 지니는 매력 중 일부에 불과하다.



3: 기술, 사회, 자본

 물이란 환경에서 사진을 촬영하려면 특수한 장비들이 필요하다. 물의 높은 굴절률을 보완해주는 특별한 렌즈 방수 카메라는 기본이다. 과학적 발견들에 의거한 기술이 없으면 수중사진 촬영은 불가능한 것이다. 과학기술은 그 딱딱한 인상과는 다르게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기술은 예술을 도우며 예술이 적용 가능한 경계를 확장시켜 나간다. 기존의 기술-이성, 예술-감성의 이분법적 도식은 현대 예술에서 설명 효과를 잃어버렸다. 일부 예술은 기술적 발전에 의존하며, 기술 역시 예술의 활용에 힘입어 위상이 드높아지고 용도가 다양해진다.


전시장 내, 사진 찍을 수 있었던 구역.


 같은 예술 매체를 다뤘지만 퓰리처 사진전과 제나 할러웨이 사진전은 확연히 달랐다. 퓰리처 상을 탔던 사진들은, 당시를 반영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기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사진들은 한 시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되고 문제의식을 시각화한다. 반면 제나 할러웨이의 사진들은 역사와 무관하다. 시대와 동떨어져, 사회적 문제의식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영역에서 사진 자체만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때문에 도구적인 유용성이나 시의성은 상실했으나, 오히려 ‘지금, 여기’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어느 때와 장소에서 보아도 아름다울 보편성을 획득했다.


 특정한 시공간과 얽혀 있지 않은 제나 할러웨이의 사진들은 마치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제약받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누구의 작품도 자본의 악력은 피할 수 없다. 제나 할러웨이의 사진들은 철저한 개인 작업과, 잡지 출품작으로 나뉠 수 있는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예술가만의 독립적인 목소리가 선명하다. 예컨대 Roll1, Roll2, Lips 등의 개인 사진들에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물이란 환경을 통해 더욱 선명히 표출하려는 사적인 욕구가 엿보인다. 그러나 Elle나 How to spend it 등의 잡지들에 실리는 작품들은, 아마 투자자의 요구에 영향을 받아 촬영된 것일 터이다. 중세의 patron-artist 관계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것만 같다.


 예술가는 결국 생계를 위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돈 받고 팔아야만 한다. 자본과 무관한 예술이란 불가능하다. 이는 필연적이기에 예술의 불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고로 제나 할러웨이의 작품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받은 것도 슈퍼 컬렉터, 즉 대자본가 찰스 사치의 컬렉션에 포함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물론 덕분에 대중은 수중 사진의 세계를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자본의 힘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예술'은 둘 사이 관계의 일면에 불과하다. 다른 한 편으로, 자본은 당장 실용성이 없는 예술도 후원할 의향을 갖고 있다. 즉 예술에 도구적인 효율성이 없어도 美 그 자체를 위해 지갑을 열 수 있다. 자본은 고도로 아름다울 작품을 위해 비싼 화장, 헤어 디자인, 드레스, 기자재 등에 돈을 투자해준다. 덕분에 작품은 더욱 적절한 소품들과 하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자본은 예술가의 물리적 생존 외로 예술성의 강화에 기여하기도 한다. 자본이 예술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이는 마치 자본이 예술을 잠식해버리면 예술 본연의 美는 퇴색될 것이란 편견에 일부 반기를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예술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서로를 돕기도, 서로를 해치기도, 일방적으로 파멸시키기도, 쫓기도.

 


4: Outro


사진 찍는 제나 할러웨이. 전시장 내 사진 찍을 수 있는 구역.


 마지막으로, 예술에는 늘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본디 내재되어 있는 것만 같다. 보통은 그림 그리는 도구나, 캔버스의 재질, 기법의 변화 등을 통해 ‘기존들’의 돌파구를 찾는데 제나 할러웨이는 예술의 환경을 바꿔버렸다. 숲 속의 미녀를 그저 평범한 침대 위에서 쁘게 재연했다면 그 예술적 의미가 덜할 것이다. 그녀가 물 속에서 잠 자고 있었기에 작품들이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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