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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Oct 04. 2015

마술적 리얼리티, 퀴담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아늑함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낯섦이 존재한다. ...... 묘사된 이미지가 지나치게 정교한 나머지 몽상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이 새로운 마술은 인간과 관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 스스로 보존하는 사물의 직관된 현존이다......"
                                                                    - 진중권,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Humanist, p. 256


 마술적 리얼리즘은 감정을 마구 발산하는 표현주의가 미술사를 휩쓸고 난 뒤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화풍이다. 구상을 묘사하는 데에 충실하되 어딘지 낯선, 몽상 같은, 문득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보았던 작품들 중 구성수의 <마술적 리얼리티>는 관광버스와 웨딩홀, 회전 목마가 주는 비현실적이고 마술 같은 이미지를 드러냈다. 실재를 마구 가공하는 문학 사조의 이름이기도 하다.


MMCA의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展에서 보았던 구성수의 사진들. 자주 마주하는 현실을 담았으나 왠지 친숙하지 않다.


 태양의 서커스단이 올린 <퀴담>을 보면서 떠오른 단어 역시 '마술적 리얼리티'였다. 모든 것이 눈 앞에서 실제로 펼쳐지고 있었으나, 환상 속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무용수들의 곡예는 실재였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힘 있고, 정교하고, 유연했다. 의상은 멜빵바지나 원피스 등 평소에 많이 보는 옷들로 이루어졌지만 색깔이나 모양이 비현실감을 주었다. 허리에 닿지 못하는 짧은 베스트, 어른이 입는 노란 멜빵바지, 얼굴을 가리우는 코트 같은 것들이 그랬다.


 무대 위의 많은 실재들, 즉 가능한 것들이 불가능해보였다. 퀴담은 '마술'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실과 비현실 언저리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는 내내 무엇이 <퀴담>에서의 마술적 리얼리티를 형성하는가? 를 생각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복제, 눈속임, 비행, 다중성, 신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았다.




 첫 번째는 복제이다. 퀴담에선 동일한 대상이 동시에 복수로 등장한다. 하나의 존재가 복제됨으로써 '고유성'이 지니는 현실성이 파괴된다. 관람객은 무엇이 근원적 존재이고 무엇이 분신인지 혼란스럽다. 어쩌면, 동일한 여러 실재들은 근원-분신 관계가 아니라 다중근원의 형태로 존재한다. 즉 각기 고유하나 모두가 획일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예시 1. 주인공 Zoe가 퀴담의 환상세계에 빠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Zoe는 눈앞에 수많은 Zoe들을 발견한다.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Zoe들은 현란한 춤을 춘다. Zoe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Zoe-분신들은 퀴담의 안내자이자 보라색 양복의 댄서 John을 둘러싸고 다리를 휘적인다.


 예시 2. Aerial Hoops 액트에선 하나의 후프에 세 명의 아티스트가 매달리는데, 그들은 모두 동일한 의상과 화장을 하고 있다. 셋은 상이한 이름과 신체를 지닌 각기 고유한 예술가이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복제가 되어 하나처럼 움직인다. Spanish Webs 액트도 유사하다.


 3명의 아티스트는 모두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어느 순간에 Zoe는 5명이 된다. 사진의 출처는 현장에서 10000원에 구입한 souvenir program 북.


 예시 3. 퀴담 무대가 진행되는 곳은 일반 공연장이 아니라 천막 안이다. 처음엔 천막이 서커스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저 도입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공연의 환경을 천막으로 설정한 데에는 미학적인 의도가 있었다. 바로 곡예사들의 그림자가 천막에 다중으로 형성된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무대 위의 복제뿐만 아니라 그림자를 통해 천막 상의 복제도 일어난다.


 복제가 마술적인 이유는 '혼란'에 있다. 고유해야할 대상이 복수로 나타나면 인지적, 존재론적 혼란이 야기된다. '무엇이 진짜인가 - 모두가 진짜이다 - 현실에서 진짜는 하나여야 하는데 - 이곳은 현실 같지 않다'라는 사유가 발생한다.

 

 마술적 리얼리티의 두 번째 요소는 눈속임이다. 복제가 심리적인 혼란을 일으킨다면, 눈속임은 시각적인 즉 물리적인 혼란을 일으킨다. 퀴담은 '회전'을 통해 이를 달성한다.


 예시 1. 후프가 돌아갈 때 분명 도구 자체는 하나의 완결된 링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회전으로 인해서 여러 링이 핑글핑글 도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회전하는 물체의 매 순간 위치가, 그 속도로 인해 잔상이 되어 지각되는 것이다.


 예시 2. 줄넘기도 마찬가지이다. 줄을 빠르게 돌리면 하나의 선이 아니라 타원이 형성된다. 여러 개의 줄넘기를 동시에 빠르게 돌리면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기하학적 잔상이 일어난다.


회전, 잔상, 그리하여 눈속임. 출처는 souvenir program 북.


  눈속임의 마술적인 효과를 설명하는 일은 동어반복적이고 순환적이다. 마술의 정의 혹은 본연적인 속성에 이미 눈속임이 내재되어 있다.


 세 번째는 비행이다. 퀴담의 등장인물들은 지상에서 활약하기도 하지만, 특수 장치를 통해 와이어를 달고 허공에서 곡예를 부린다. 공연 천막 내에서 사진촬영이 불가능하여, 인터미션 중 어느 영수증 뒷면에 기록해둔 빅탑 씨어터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프로그램북의 영수증에 휘갈긴 공연장의 모습으로, 스케치가 미천하다 허허

 서커스 천막답게 빅탑의 꼭지점으로부터 완만한 산처럼 지붕이 내려와 있다. 본무대는 동그랗고 관객석은 무대를 둘러싸는 도넛 모양이다. 본무대의 후방엔 뮤지션들이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공간이 있고, 그 앞 언저리엔 본무대로 통하는 주변무대가 있다. (전문 용어가 아니고 내멋대로 갖다 붙여서 쓰고 있다)

이 주변무대의 미학은 네 번째 키워드에서 다루도록 하자. 비행에서 중요한 것은 천장에 달린 아치모양의 장치이다.


 천장에 달린 아치는 무대 위를 굽게 관통한다. 곡예사들은 주변무대의 근처에서 장치의 시작부로부터 와이어를 타고 점점 무대 중앙의 허공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관객은 하늘에 떠 있는 예술가와 마주한다.


 예시1. Zoe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아빠와 엄마는 무심하게 의자에 앉아있다. 하지만 John과 익명의 남자가 등장하자 미스터리 여행이 시작되고, 둘은 허공으로 떠오른다. 비행은 판타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예시2. 줄이나 천을 이용한 곡예들은 대부분 허공에서 이루어진다. Aerial contortion in silk 액트나 Spanish Webs 액트는 하늘에 매달린 천 혹은 줄을 온몸에 휘감고 몸을 돌리고, 아름다운 자세를 취하고, 감았던 것을 풂으로써 아슬아슬하게 지상으로 떨어져내린다.


극의 초반부 하늘로 떠오르는 Zoe의 엄마와 아빠, Spanish Webs 액트의 곡예사들. 출처는 souvenir program 북.


 비행의 마술적인 효과는 직관적이다. 인간 신체는 중력을 거스를 수 없으므로 지상에 붙어 있다. 비행은 필연에 위배되며 고로 비현실적이다. 그렇기에 마녀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선인은 공중부양을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퀴담에선 와이어를 통해 가능하다. 허공의 곡예를 바라보는 관객은 환상에 젖게 된다. 이야말로 마술적 리얼리티가 아니고 무엇일까.


 네 번째는 다중성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퀴담의 무대는 이분화되어 있다. 시선이 집중되는 본무대와, 본무대로 이어지는 그러나 상대적으로 덜 주의되는 주변무대. 서커스의 주가 되는 사건과 곡예는 모두 본무대에서 이루어지지만 그렇다고 주변무대가 비어 있지는 않다.


 본무대에서 화려한 기술이 선보여지는 가운데 주변무대에선 빨간머리를 한 댄서가 미친 듯이 춤을 추기도 하고, 둥근 치맛자락을 지닌 귀부인이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허연 옷을 입은 무용수의 무리가 가만히 누워 관람객마냥 곡예를 구경하기도 한다. 이원화된 무대에서 동시에 다중의 퍼포먼스가 행해지면 시선은 분산되기 쉽다.


 본디 극은 집중을 요한다. 무대와 非무대는 철저히 구분되고, 구별을 바탕으로 주의는 유일한 무대로 집중되어야 한다. 발생하는 사건은 대개 하나이고 묘사되는 상황 역시 하나이다. 그런데 퀴담에서 연출하는 상황은 마치 무대가 둘로 나뉘어서 별개의 사건들이 발생하는 연극과도 같다. 한 쪽에서는 허공에 매달린 줄로 그네를 타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물에 걸린 권투 글로브를 이용해 힘 있는 동작을 선보인다. 자, 어디를 볼 것인가.


출처는 souvenir programs 북

 사진으로 예시를 보이고 싶었다. 본무대에서 Aerial hoops 액트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저 뒤에 나팔 부는 사나이가 있다. 나팔 퍼포먼스도 공연의 일부이며 무대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후프 곡예도 함께이다.


 상상하자면 '두 무대가 동시에 진행되네 - 어디를 보아야 하지 - 하나만 볼까 - 다른 하나도 놓칠 수 없다 - 에잇, 혼란스러워'가 되겠다. 혼란은 마술의 효과 중 하나로, 유일한 실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분산시킨다. 퀴담은 다중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마술을 부린다.


 마술적 리얼리티의 마지막 요소는 신체이다. 신체는 극도로 현실적인데 어째서 마술이냐고 묻는다면 공연을 보여드리고만 싶다. 퀴담에서 드러나는 신체는 환상에 가까운 아름다움 그리고 힘 그 자체이다.


 유연성은 극한에 달하여 절대 접촉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부위가 서로 맞닿는다. 높은 균형대 위에서도 한 손으로 온 몸을 지탱하고, 한 발로 우아한 춤을 춘다. 머리와 머리가 붙은 채로 두 개의 신체가 하나의 거인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덤블링으로 군무를 맞추기도 한다. 뼈를 깎는 연습과 엄청난 힘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력과 건강한 신체는 너무나도 심미적이다.


statue 액트. 사랑을 표현한 것도 같다. 출처는 souvenir program.

 

 이로써 태양의 서커스단이 선보인 <퀴담>을 '마술적 리얼리티'와 그러한 실재를 일으키는 '복제, 눈속임, 비행, 다중성, 신체'로 분석했다. 극한으로 현실적인 현대사회에서 팝콘을 집어 먹으면서 서커스를 볼 수 있다니, 감상 행위만으로도 환상적인 것 같다. 공연은 11월 1일까지 진행된다고 하니 겨울에 대비하여 마술로 마음을 미리 덥혀 놓을 것을 추천한다.







 


잡담1. 직접 구매한 프로그램북의 이미지를 핸드폰의 카메라로 찍어서 게시했다. 나는 글을 쓸 때 소심해지는 경향이 있어서(사실 언제나 소심하다) 언론정보학과에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이것이 저작권법에 위반되는지 물어보았다. 친구는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나는 무한히 소심하므로, 혹시라도 문제가 된다면 사진들을 모두 내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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