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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Oct 03. 2015

정신의 결정, 매난국죽

ddp 간송 문화전을 다녀와서


 DDP는 허옇고 넓었다. 꾸불꾸불한 구조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 뻔도 했지만 무사히 전시장에 도착했다. 여태까지는 서양화 전시들만 쫓아다닌 탓에, 동양화엔 무지할 뿐더러 감상 경험도 몇 번 없었다. 다행히 같이 다녀온 언니가 고등학교 때 동양화로 입시를 준비했어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다.


 문외한이라 글을 쓰기 조심스럽지만 사소한 후기를 남겨보려 한다.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음'의 역할이 컸다. 유덕장의 <설죽>은 눈 맞은 대나무를 표현하기 위해, 댓잎 위 눈뭉치들의 주변을 검게 칠했다. 눈이 있는 곳의 외부를 채움으로써 흰 공백을 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심사정의 <매월만정>도 달의 윤곽선 밖으로만 붓질을 하여 천체를 그려내었다. 적극적인 작위뿐만 아니라 부작위, 그리고 구별만으로도 존재가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지 않고 다만 유를 유1과 유2로 나눈다.


 절제미도 드러났다. 그림들은 꽉 차 있지 않았다. 대상이 그려진 부분보다 텅 비어 있는 영역이 더 넓기도 하다. 배경은 대개 종이의 면으로 대신했다. 많은 것을 구겨넣지 않고도 오랫동안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들이었다. 굳이 그리지 않아도 된다면 붓을 내려놓아도 될 것이다.


  피터르 브뢰헬의 그림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브뢰헬의 그림들은 늘 꽉 차있고, 그 덕에 매력이 있다.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것도 즐겁고 전반적인 충만함이 주는 포근함도 좋다. 브뢰헬의 그림은 여백이 없어 아름답고 사군자를 그린 그림들은 여백이 있어 아름답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표현 방식이나 매체,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키느냐의 문제이다. 아래의 왼쪽은 브뢰헬, 오른쪽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다.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출처: Google images


 한 편, 여백 넘치는 동양화가 대상으로 삼은 자연엔 빈 공간이 없다. 자연은 언제나 꽉 차 있다. 나무로, 숲으로, 산으로 시야는 뒤덮이게 된다. 자연물이 없더라도 시퍼런, 먹색의, 혹은 하얀 하늘이 파괴할 수 없는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양화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에 부차적인 관심을 지닌 것 같다. 사군자를 그린 화가들이 붓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구체적인 대상보다는 그 대상에 상징적으로 부여되고 주관적으로 이입된 정신이다. 작품 설명에도 "기개", "기품", "기상"이란 말이 유독 많았다. 육안으로 포착할 수 없는 氣를 화면에 담고자 했다.


 진정한 화가가 되려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흐는 거친 필치로 모델의 영혼을 담았고, 모네는 흩뿌려진 빛깔로써 공기를, 드가는 무희를 통해 '움직임' 그 자체를, 뭉크는 푹 패인 볼과 보라색으로 불안을 그려내었다. 관찰할 수 없는 것의 시각화는 화가의 과제 중 하나이다. 그리고 동양화는 '기운'을 시각화함으로써 이를 달성하였다.


출처: Google images




 'Art'라는 말에는 '기술'이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예컨대 에리히 프롬의 <Art of Loving>은 '사랑의 예술'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로 번역된다. 물론 근현대에 들어서는 완전히 판도가 바뀌었지만, 내가 본 고전적인 서양화들은 사실적 재현을 지향했던 것 같다. 그림들은 예술적이면서도 동시에 대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테크닉을 요했다. 화가는 일면으로 기술자였다. 그랬기에 사진기술의 등장이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백을 남김으로써 대상의 복사를 포기한 사군자의 화가들은 기술자보다 정신가에 가까워 보인다. 전시된 작품을 그린 이들 중 전문화가도 있었지만 문인들이 많았던 게 신기했다. 테마가 사군자여서 특히 그랬다. 여하간, 동양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들은 기술적으로 재현된 사물이 아니라 정신이다.


 서양화에 정신이 깃들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서양화에는 동양화와는 다른 종류의 감성과 정신성이 내재되어 있다. 또한 사실적인 재현과 그 기술적인 면모가 기계적이거나 비예술적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동양화는 수정이 어렵다. 정신을 가다듬고 한 번에 제대로 그려야 한다. 그렇기에 더욱 동양화가들이 정신가들로 다가왔다. 완벽을 염두에 두며 붓을 잡으려면 고도의 정신 수양이 필요할 것 같다. 함께 관람한 언니도 "[동양화가들은] 도 닦는 것 같아"라고 말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스케치를 하고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고 실수를 해도 다른 색으로 덮을 수가 없으니, 처음부터 그림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이 얼마나 차분하고 정갈해야 할까. 존경스러웠다. 나도 그런 자세로 글을 쓸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릴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뿐이기에 생기는 효과도 좋았다. 먹물에 종이가 울어 있거나, 붓에 물이 부족해 스크래치 나듯 그려진 부분들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얼룩과 뻑뻑함마저 美가 되다니 멋지다.


 그림이 그려진 면에는 한자들이 공존한다. 서예가 독자적인 예술 분야로 존재할 만큼 한자는 언어적인 유효성과 유용성을 넘어서서 그 형태만으로 심미성을 지닌다.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아름다웠을 텐데 나의 무지가 한스럽다. 글자와 그림이 배치된 구도도 인상 깊었다. 잘 만든 포스터의 옛날 버전을 보는 기분이었다.


 서명은 도장을 찍어 남겼다. 죄다 흑백인 가운데 네모난 도장만 빨갛게 도드라진다. 그 현저함이 싫지 않았다.



김홍도의 <백매>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닐 수도 있다. 몹쓸 기억력을 탓하자.

 마지막엔 엽서를 사고 나왔다. 전시회를 보고 나오면 늘 엽서를 하나씩 사서 침대 맡에 붙여놓는다. 대만의 고궁박물관에서 샀던 dragon boat 엽서 이후로 나의 두 번째 동양화 엽서이다. 다른 작품과 달리 눈을 표현하기 위해 정말로 흰색 물감을 칠한 그림이다. 아트숍에서 보자마자 '이거다!' 싶어 번쩍 지갑을 열었다. 가격은 3000원으로 엽서 치고는 싸지 않았지만 비싸다고 손이 멈추지는 않더라.


  서양화엔 서양화만의 매력이 있고, 동양화엔 동양화만의 기상이 있다. 세계를 공유했음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음에 경이롭다. 사실 그림들에 '서양화', '동양화'라는 포괄적인 언어를 사용하기가 조심스럽다. 진정한 서양, 고유한 동양이 존재할 리 없다. 지리적 동양은 문화적 서양을 흡수했고, 지리적 서양은 문화적 동양의 영향을 받았으니 둘을 경계 짓는 것에 설명적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다. '동양화'가 아니라 '간송문화전에서 본 그림들'이라고 표현했어야 하나 싶지만 편의 상 수정하지 않겠다. Phrasing은 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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