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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Nov 26. 2015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데미안을 읽은 뒤


 p. 175 나는 자연이 던진 주사위였다. 불확실성을 향해, 어쩌면 새로움을 향해, 어쩌면 무를 향해 던진 주사위. 태고의 깊이에서 던진 이 주사위를 작용하게 하고 그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고 완전히 나의 의지로 만드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나의 소명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p.195 싱클레어, 아직 어린 아이군요! 싱클레어의 운명은 싱클레어를 사랑해요. 싱클레어가 충실하기만 한다면, 그 운명은 언젠가는 꿈꾸는 대로 완전히 싱클레어의 것이 될 거예요.

 <데미안> 중. 헤르만 헤세 작, 김인순 역, 열린 책들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이 있다. 이는 최악의 거짓말이다. 지나간 사건들이 현재를 빚으므로 과거 없이는 현재도 없다. 과거는 명백히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이지 시체더미가 아니다. 부정하지 말고 직면하고 되새겨야 한다. 현재라는 핵과 공생하는 그 한 철의 에너지들을 하나씩 더듬고 응시해야 한다.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과거들이 풍부한 의미를 지닌 채로 현재에 머무른다. 그러한 현재는 미래를 잉태한다. ‘결정’이 아니라 ‘잉태’다. 태아(미래)는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현재)와 닮았다. 어머니의 얼굴과 성향, 불안과 쾌락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아이는 그 모든 선천적인 양분들을 제 그릇에 멋대로 담고, 온갖 다른 것들을 섞어서, 게걸스레 먹어 치운다. 잔뜩 흘리기도 하면서 꿀꺽 삼켜 넘긴다. 양분이 모두 소화되면 아이는 성장한 것이다. 이제 어머니를 제 안에 품으면서도 다른 존재가 된다. 이것이 잉태의 의미이자 지향점이다. 미래는, 현재를 지속하면서도 변화시키는 것이다.


 ‘지금’을 들여다보면 먼 이전과 먼 미래가 보인다. 불시의 사고를 당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 매 순간에는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점들이 모두 잠재해 있다. 니체의 사상대로, ‘지금’에는 영원이 담겼다. 한 편 자유 의지니 결정론이니 하는 논쟁엔 결론이 생겼다. 둘 다 옳다. ‘지금’에 와서는 함께 만나기 때문이다. 현재에 우리는 운명적인 선택을 하는 동시에 선택으로 운명을 만든다.

 

 이는 시간이 점이냐, 선이냐 하는 논쟁과도 관련이 깊다. 아들러 심리학을 풀어 쓴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에 따르면 시간은 점의 형태를 띤다. '지금, 여기'들만이 점으로서 반짝일 뿐이므로 과거의 자신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명멸하는 점들로서의 시간을 부정하고 선적인 시간, 서사적인 시간을 누리라고 권유한다. '사색'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상충되는 주장을 하는 두 책을 읽고 나니 "시간은 점인가, 선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 책은 현재에만 집중하라 하고, 다른 책은 현재를 이야기의 중력 속으로 끌어들이라 하다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데미안>에서 나온 운명에 관한 구절들을 읽은 뒤, 문득, 둘 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점이자 선이다. 선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점은 자신에게 설 자리를 제공하는 선을 사랑해야 한다. 


 즉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통해 구현되지만,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의해 가치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지금에 몰입하면서도 그 이전과 이후에 의해 생기는 의미들을 상기해야 한다.


 시간에 관한 모든 주장은 결국 '현재,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귀결된다. 이에 <데미안>은 나름의 의견을 낸다. 마음속에 굳은 의지와 간절한 소망을 품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의 운명을 꿰뚫어보고, 그에 귀 기울이고, 그 향기를 추적하고, 음미하고, 성스럽게 어루만져야 한다. 운명의 실현을 방해하는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희망의 눈꺼풀을 쓰고 보면 된다. 소망을 와해시키려는 시스템과 폭력에 대해선, 현재에 머무르고 잉태된 나의 운명이 말하는 대로 대처하면 된다.



Cover image: Salvador Dali, Persistence of Memory,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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