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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Dec 29. 2015

빈지노의 If I die tomorrow와 하이데거

힙합과 실존철학의 만남



 피아노 소리가 짤막하게 들린 뒤, 오색의 빛이 쏟아지는 듯한 도입부가 이어진다. 빈지노는 나지막하게 죽음을 이야기한다. ‘만약 오늘 밤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이란 가정으로 시작하는 빈지노의 곡 <If I die tomorrow>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노래하는 예술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오늘 밤이 만약 내게 주어진
돛대와 같다면 what should i do withthis?
mmmm maybe
지나온 나날들을 시원하게 훑겠지

스물 여섯 컷의 흑백 film
내 머릿속의 스케치
원하든 말든 메모리들이
비 오듯 쏟아지겠지

엄마의 피에 젖어 태어나고 내가 처음 배웠던 언어
부터 낯선 나라 위에 떨어져 별 다른 노력 없이 배웠던 영어
나의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나의 새 아버지에 대한 나의 존경
갑자기 떠오른 표현, life's like 오렌지색의 터널

If I die tomorrow
If I die die die

고개를 45도 기울여
담배 연기와 함께 품은 기억력
추억을 소리처럼 키우면
눈을 감아도 보오이는 theater

시간은 유연하게 휘어져
과거로 스프링처럼 이어져
아주 작고 작았던 미니어쳐
시절을 떠올리는 건 껌처럼 쉬워져

빨주노초 물감을 덜어, 하얀색 종이 위를 총처럼 겨눴던
어린 화가의 경력은 뜬금없게도 힙합에 눈이 멀어
멈춰버렸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어 cuz I didn'tgive a fuck
about 남의 시선, cuz life is like, 나 홀로 걸어가는 터널

내게도 마지막 호흡이 주어지겠지
마라톤이 끝나면 끈이 끊어지듯이
당연시 여겼던 아침 아홉 시의 해와
음악에 몰두하던 밤들로부터 fade out

말보로와 함께 탄, 내 20대의 생활,
내 생에 마지막 여자와의 애정의 행각
책상 위에 놓인  1800원짜리 펜과
내가 세상에 내놓은 내 노래가 가진 색깔

까지 모두 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삶이란 게 좀 지겹긴 해도 좋은 건가 봐
엄마, don't worry bout me ma
엄마 입장에서 아들의 죽음은 도둑 같겠지만

I'll be always in your heart, 영원히
I'll be always in your heart, 할머니
you don't have to miss me, 난 이 노래 안에 있으니까
나의 목소리를 잊지 마 

If die tomorrow (가사 출처: 네이버 뮤직)

 

 내일 죽음이 오리라고 상상한 가수는 오늘, 지난 삶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1절의 가사는 그를 자신의 어린 시절로 불러낸다. 탄생의 순간과 가족과의 만남에 대해 읊조린 뒤 그는 삶을 “오렌지 색의 터널”로 비유한다. 주황색은 빨강과 하양이 섞인 색깔이다. 태어난 이는 제 속에 시뻘건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치열하게 살고자,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바꾸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인생에는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들이 있다.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와 어떤 부모를 만날 것인가 등이 그렇다. 이렇게 인간은, 선택권 없이 내던져진 배경과 같은 백지 위에 붉은 정열로 삶을 그린다.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빨간 부분과 그럴 수 없는 하얀 부분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주황색의 길이다.


 2절의 초반부에서 화자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마치 영화 보듯 관람한다. 그림을 그리다가 힙합을 사랑하게 된 그는 다른 이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음악의 길을 걷는다. 인생은 “나홀로 걸어가는 터널”이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은 아무도 대리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나’의 삶을 살아줄 수는 없다. 인간은 모두 저마다 다른 가능성을 떠맡은 각자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인간은 자신의 고유함을 잊은 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매몰된다. 세간적인 가치를 좇아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일반적인 평가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스스로를 유행과 시류에 편승시킨다. 뚜렷한 소신 없이 명예와 권력만을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제 의견도 없이 ‘다른 사람들은 ~라고 말’하기때문에 ‘나도 ~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거듭, 인생은 “나 홀로 걸어가는 터널”이다. 터널의 끝에는 죽음이 있으며 죽음 앞에서는 선택을 대신해줄 세상 사람들 없이 ‘나’ 혼자뿐이다. 돈도 이름도 힘도, 그 어떤 타인의 잡담도 무의미해진다. 언젠가는 끝날 삶을 진 인간, 죽음을 향한 존재인 인간은 세상의 소리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노래해야 한다.


 뒤이어 “내게도 마지막 호흡이 주어지겠지”라는 생각이 화자의 뇌리를 스친다. 이르든 늦든 자신에게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자각은 지루했던 일상을 아름답고 특별한 것으로 반짝이게 한다. 죽음 앞에선 “당연시 여겼던 아침 아홉 시의 해와 음악에 몰두하던 밤들”, “1800원짜리 펜”이 모두 달리 보인다. 다시는 바라보고 느끼고 어루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확실한 사실을 떠올리는 일은 지금의 삶에 대한 기쁨을 불러일으킨다(“삶이란 게 좀 지겹긴 해도 좋은 건가 봐”).


 죽음에 대한 자각은 삶의 소중함만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귀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준다. ‘어떻게’에 대한 실존철학의 답은 ‘각자 최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본래적인 가능성’이다. 빈지노는 “난 이 노래 안에 있으니까”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음악으로 규정하며 죽음이 올지라도 받아들이려 한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 앞에서, 스스로에게 고유한 본래적인 가능성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빈지노(©스포츠투데이DB), 앨범 프로필(출처: pinterest),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표지 ©까치) 


 노래는 ‘If I die tomorrow’라는 가사를 반복하다가 서서히 소리가 작아지며 정적 속으로 파고든다. 이 곡은 실존철학의 대가인 마르틴 하이데거의 명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자연스럽게 노래의 가사를 그의 저서에 입각하여 해석할 수 있었다. 아래는 해석의 밑바탕이 된 책의 내용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현존재(dasein)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인 삶의 가능성과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도피, 구현, ……) 일종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도록 내던져졌다. 일상적으로 인간은 도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세계에 빠져 삶으로써,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한다. 세상 사람들의 애매한 잡담에 귀 기울이며 “남들은 ~게 하더라”라는 공공의 해석에 순응한다. 이러한 ‘평균적인 일상성’ 속의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소외되어 비(非)본래적으로 실존한다. 그들은 세간적인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기분인‘불안’과 인생의 끝을 미리 의식하는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서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에 다가설 수 있다.


 특히 ‘죽음으로의 선구’라는 개념은 노래의 제목 <If I die tomorrow>와 맞닿아 있다. <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죽음은 다른 사람에 의해 대리될 수 없는 경험으로 사람에게 저마다 고유한 가능성이다. 일상적으로 인간(현존재)은 죽음이 내가 아니라 남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짐작해버린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올 지 모르는 무규정적인 사건이므로 그런 안일한 태도는 비본래적인 실존에 속한다. 죽음에 대해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본래적인 태도는 ‘미리 달려가 봄’ 즉, 죽음으로의 선구이다.


 죽음으로의 선구를 자살로 오해해선 절대 안 된다. 죽음으로의 선구를 이해하기 위해 <존재와 시간>의 본문을 살펴보자.

 “미리 달려가 봄은 현존재에게 ‘그들’-자신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이며 현존재를, 배려하는 심려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 ‘그들’의 환상에서부터 해방된 정열적이고 현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불안해하는 죽음을 향한 자유 속에 있는 자신이다(<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까치 출판사, 1998, p.355).”


 인용된 본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죽음을 미리 고민해봄으로써 자신이 여태까지 세간적인 가치에 빠져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죽음 앞에선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해온 것들이 덧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타인의 지침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즉 자기 자신 안의 목소리에 따라서만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으로 선구한 인간은, 평소에 신경 쓰던 사람들의 가십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홀로,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마주하며 그에 책임을 지게 된다. (선구의 방법은 ‘양심’과 ‘결단성’을 통해 설명된다.)


 ‘죽음으로의 선구’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면서 세인의 시선을 배제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If I die tomorrow>와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 곡은 끝자락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넌지시 노래함으로써 본래적인 가능성의 구현까지도 암시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빈지노의 <If I die tomorrow>를 비교해보았다. 이로써 예술의 결과적인 기능 중 하나는 철학을 직감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반대로 철학이 예술을 설명하며 기능하는 것도 가능하다. 두 매체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을 표현할 수 있다.


 유사한 결론을 전달함에 있어서 예술과 철학은 저마다 특유의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택하면 된다. 다만 예술은 좀 더 감각적인 이해를 동원하는 반면 철학은 논리적인 이해를 요한다. 설령, 엄밀한 논리를 강조하는 사조를 비판하는 철학이더라도 말이다. 서로 다른 루트를 택했어도 마지막엔 삶에 있어서 죽음을 생각하는 입장을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다.


 빈지노의 노래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죽음에 대한 자각과 그로부터의 깨달음을 표현한다. 해골을 보석으로 장식한 데미안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 쏜톤 와일더의 희곡 <우리 읍내> 등은 분위기와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감상자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취하도록 촉구한다. 특히 <우리 읍내>에서는 극 중에 주인공 에밀리가 죽고 난 뒤, 자신이 살았을 때의 일상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통해 감상자는‘내가 죽었을 때 지금의 삶을 바라보면서 만족스러워할까?’라고 자문하며 죽음으로 선구 해볼 수 있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 데미안 허스트, 2007, ©화이트 큐브 소장 그리고 연극 <우리 읍내>, ©오마이뉴스 김기 (출처: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47652#cb)


 죽음이 자신과 동떨어진 현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What if I die tomorrow?’라고 외쳐보면 어떨까? ‘내가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 이렇게 살까?’, ‘내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지금의 삶이 바람직했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를 물으면서 죽음으로 미리 내달려 가보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의외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좋은 기준이 되어준다.




(본 기사를 쓰기 위해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기상 역, 까치,1998)>,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만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임선희 글, 최복기 그림, 주니어김영사, 2009)>, 그리고 박찬국 교수님의 2015년도 2학기 ‘실존철학’ 강의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하이데거의 사상에 관련된 부분은 책의 내용과 강의 필기에 저의 이해를 덧붙인 뒤 풀어서 설명한 것임을 밝힙니다.)


Cover image: Caspar David Friedrich,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oil on canvas


덧붙이는 말 1) 필자가 디아티스트 매거진에 2015년 12월 28일 게재된 칼럼을 브런치로 옮긴 것입니다. 

덧붙이는 말 2) 데미안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본 글은 해당 작품이 죽음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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