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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Jan 04. 2016

400년 전의 단순한 삶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리뷰


 세상이 복잡해졌다. 할 수 있는 것도 갈 수 있는 곳도 많아졌지만, 편의와 선택지가 증대된 만큼 마음 써야 하는 일이 늘어버렸다. 커다란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자잘한 것에까지 신경을 쏟게 된다. 평온을 찾아 홀로 미술관을 다녀왔다. 액자 속에서 고요히 미소 짓는 그림들을 보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6년 4월 10일까지 열리는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명품전-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展은 16세기에서 19세기 사이의 서양 초상화, 조각, 정물화, 가구 등을 전시한다. 특히 17세기의 작품이 많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지구 저 편 사람들의 모습이 벽을 메운다. 그들의 삶은 무척 단순해 보였다. 무모한 순진함이나 무지로서가 아니라, 복잡한 고민과 신경증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단순함이었다.


 그들의 홀가분한 삶을 동경하며, 감명 깊었던 여섯 개의 작품을 각각의 특성과 함께 되짚어보려 한다.

 

<바다의 선물>, 야코프 요르단스 & 프란스 스네이데르스, 1640/1650

단순한 삶 1. 감사

 <바다의 선물>은 인간이 바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을 그려낸다. 대각선 구도 덕분에 물고기들이 차곡차곡 쌓인 느낌이 들어 풍요가 강조된다. 물고기의 비늘이나 눈알의 빛깔, 꼬리의 결, 거북이 등껍질의 올록볼록함, 소라의 표면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벽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그림인데도 세부적인 것 하나 하나에까지 공을 들였다. 때문에 집중력이 분산되기는 하지만 찬찬히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이 그림은 바다에 대한 '감사'를 시각화한다. 자신이 입은 수혜에 입각하여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인 감사는, 불만이나 절망과 대비되는 일종의 낙관이다. 감사는 욕심을 배제하기 때문에 단순한 삶의 근간을 이룬다. <바다의 선물>에 나오는 인물들은 바다에 고마움을 표함으로써 거룩한 표 그리고 가벼운 마을 얻게 되었다.


<어른이 노래하면 아이는 파이프를 분다>, 야코프 요르단스, 1644

단순한 삶 2. 음악

 식탁을 둘러싸고 모두가 음악을 즐긴다. 어린 아이들은 저마다 볼을 실컷 부풀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어른들은 그에 맞춰서 노래를 부른다. 밝고 힘찬 가락이 들려오는 듯하다. 간식과 식기의 묘사는 그림에 생기를 더한다. 식탁 오른 편의 치즈는 두툼한 몸에 노란 속살, 흰색과 청회색이 섞인 표면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부드러우면서도 느끼한,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치즈의 맛이 입안에서 느껴지는 것만 같다. 은색의 식기는 사람들을 반사하면서 빛나고 포도는 탐스럽게 투명하다.


 이 그림 속의 평온이 사랑스럽다. 스마일 표시 이모티콘처럼 노골적으로 웃는 얼굴은 없어도 모두가 음악에 집중하며 행복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은 어떤 고민도 잠시나마 잊혔을 것이다. 한적한 오후에 합주라니, 이보다 평화로울 수는 없다.


<뚱보들의 식탁>, 얀 스테인, 1660년대 후반

단순한 삶 3. 음식

 오른쪽엔 한 아이가 달걀을 깨뜨려서 아쉬워하고, 가운데엔 땅딸막한 남자가 물을 들이키며, 왼쪽엔 등 돌린 여자가 커다란 냄비에 음식을 준비한다. <어른이 노래하면 아이는 파이프를 분다>가 귀족들의 한적한 생활상을 보여준다면 <뚱보들의 식탁>은 서민의 모습을 그린다.

 

 이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 않고 집도 허름하다. 황금빛 조각상으로 장식되었을 귀족의 벽난로와 달리 이곳의 화로는 잿빛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 앞에서는 그들도 똑같이, 혹은 훨씬 더 만족스러워 보인다. 모두 빨간 볼에 살이 올라 있고 입꼬리는 다정하게 올라갔다. 특히 붉은 모자를 쓰고 닭고기를 써는 남자는 "이것만 먹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라 말하는 것 같다.


 먹는 즐거움을 빼놓고는 단순한 삶을 논할 수 없다. 어쩌면 요즘 선풍적인 '먹방'이나 '쿡방'의 인기는, 복잡한  삶의 가운데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식사에 대한 집단적인 애정과 열망의 표현일지 모른다.


<베들레헴의 인구 조사>, 피터 브뤼겔, 1566

단순한 삶 4. 놀이

 이 그림은 원작이 아니라 브뤼겔 가문의 사람이 그린 모사화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옥에 티'를 찾을 수 있었는데, 전시장에서 보면 왼쪽의 길다란 나무 밑동에 눈코입 없는 사람이 회색 옷을 입은 채로 그려져 있다.


 <바다의 선물>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감상하면서 세부사항들을 눈 여겨 보면 즐겁다. 풍속화인만큼 다양한 생활상이 재치 있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푸른 옷을 입고 베들레헴에 도착한 마리아만큼이나 눈을 갖고 '노는' 사람들이 비중 있게 다뤄진다. 놀이는 쾌락을 지향하며 지친 마음 휴식을 준다. 목적성이 뚜렷하고 규칙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개 누구든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다.


 천진난만하게 눈싸움을 하거나 썰매를 타고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는 정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유쾌하게 해준다. 둥글둥글한 얼굴과 몸뚱이로 눈 위를 누비는 인물들이 귀엽다. 그들이 열심히 흔들어대는 팔과 다리가 풍경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즐기는 모습도 정겹다. 모두 놀이 덕분에 가능한 경쾌함이다.


<천문학자>, 헤라르트 다우, 1650s

단순한 삶 5. 몰입

 헤라르트 다우는 확대경을 들고 세필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니터 화면의 절반쯤 되는 크기로, 다른 그림들에 비해 작았다. 오늘날에도 거대한 조형물을 설치하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세부에 목숨을 거는 미니어쳐 장인들이 있다. 크기에 대해 서로 다른 취향을 보여주는 것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듯 하다.

 

 직업이든 취미이든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들면 시간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누군가가 일에 열중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시간을 정지시키는, 혹은 시간을 초월하는 감정이다. 작품 속의 천문학자는 늦은 시각에도 촛불을 켜고 지구본을 관찰하고 있다. 밤에 맞서서 학구열을 불태우는 그는, 무시간적인 경험을 체화한 아름다운 사람이다.


<바니타스 정물화>, 피터르 클라스존, 1630

단순한 삶 6. 긍정적인 무상감 

 으스러져가는 초가 점처럼 작아진 마지막 불꽃을 태워 보내고 있다. 그 옆으로 진귀한 보석과 그릇이 어지럽게 나뒹군다. 알알이 반짝이는 진주 목걸이, 먼 바다에서 온 듯한 소라고둥, 활짝 열린 보석함 속의 금줄. 그러나 이 화려한 물건들은 왜인지 쓸모 없어 보인다. 아무리 값비싼 것일지라도 소유자가 죽고 나면 무의미해진다. 서 있지 못하고 옆으로 엎어진 잔이 무용한 것처럼 말이다.


 바니타스(vanitas)란 라틴어로 덧없음을 의미한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인생무상을 연상하는 소재들을 가라앉은 색채로 화폭에 담는다. 황금 잔처럼 귀한 물건은 부귀영화나 쾌락을 뜻하고, 다 타버린 촛불(이나 해골)은 유한한 인간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러한 상징성을 통해 바니타스 정물화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한시적이고 허무한가를 나타낸다.


 그림의 어두운 분위기는 퇴폐적이고 서글픈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인생무상을 자각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도 보물도 거대한 세계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은 감상자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대개 사람들의 고통은 돈, 명예, 권력, 지식, 혹은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는 데서 온다. 그러나 바니타스 정물화가 함축하는 무상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수용면, 덧없는 것들(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것들)에 대한 욕심을 비울 수 있다. 그 뒤엔 단순하고 차분한 삶과 자유가 기다릴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나'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며 "맑은 공기, 태양, 바다, 밀로 만든 빵처럼 단순하면서도 영원한 것들"로부터 "기쁨"을 얻는다고 말한다(<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열린 책들, 2000, p.134). 어쩌 진정한 즐거움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에서 온다. 하루쯤은, 400년 전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단순한 삶을 누려보자. 주변의 것들에 감사하고, 멋진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어떨까? 복잡한 고민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디아티스트 매거진에 2016년 1월 3일 기고한 칼럼을 브런치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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