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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Jan 05. 2016

점의 의미

<김환기의 선, 면, 점> 전시 리뷰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면 곧바로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피카소쯤 되면 저것이 과연 사람인지 반신반의하게 된다. 전근대의 그림들이 잘 닦인 벽돌길이라면, 모더니즘 이래로 많은 구상화는 벌판과 경계가 모호한 데다가 잡초와 들꽃이 무성한 비포장도로가 되었다.


 그런데 추상화는 표지판 하나 없는 광야다. 어느 쪽도 길이 될 수 있지만 어느 곳으로도 인도되지 않는다. 해석의 자유와, 해석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공존한다.


 추상화는 모사하지 않는다. 재료를 갖고 추상할 뿐이다. 그려진 것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덕분에 감상의 길잡이만 찾으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만의 감을 잡지 못하면 당황하고 만다. 연신, 맘속으로 “이게 뭐지?”라 외쳐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현대화랑에서 열린 <김환기의 선線 면面 점點>도 자칫하면 난해한 그림들로 득실거리는 미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질문만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으면 미아 신세를 면할 수 있다. 감상의 기준이 되는 그 물음은 바로, ‘점의 의미가 무엇일까?’이다.


 김환기의 그림 속엔 특이하게 생긴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다. 네모난 틀 안에 동그란 얼룩처럼 찍힌 점은 특수문자로 치면 ▣와 비슷하다. 점들은 하나씩 동떨어져 있지 않고 모여서 무리를 이룬다. 점은 더 큰 대상을 이루는 작은 단위인 것이다.  이때 점을 무엇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림을 달리 이해할 수 있다. 아래는 점을 순간, 인간, 원자로 달리 봄에 따라 그림을 자유롭게 해석한 것이다.


해석 1. 점은 순간이다. 점들이 모여서 시간을 만든다.

 시간은 무수한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탄생, 삶, 죽음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 위치한 사건이다. 순간들은 운명을 따라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지나간다.


<무제 27-B-74 #333>, ©김환기, 1974, 현대화랑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있다. 두 개의 근원적인 빛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으로부터 하나의 균일한 흐름이 생성된다. 아기의 첫 번째 시간은 배경의 수많은 점들, 즉 미래를 잉태한다. 탄생 이후의 순간들이 운명이란 코드에 내장된 채로 인간은 태어난다.


<무제 V-66>, ©김환기, 1966, 현대화랑

 삶을 기리는 어느 페스티벌의 현장 같다. 세 개의 등(燈) 아래서 춤을 추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인생이란 다리로 만든 무대에 서 있다. 탄생에서 죽음으로 가는 다리의 중간을 막 건너는 참이다. 불빛 아래로 반짝이며 흐르는 순간들을 거쳐, 이미 수명의 절반을 산 것이다. 무대 아래엔 무용수에게 집중하는 단 하나의 머리가 있다. 그것은  춤추는 이의 운명이다. 운명은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제 주인을 응시하고 노려보고 애잔히 쳐다보다가 다리의 끝에서 생명을  낚아챌 것이다.

 

 한편, 소리는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림은 정지된 화면이지만 음악은 어느 순간 터져 나왔다가 어느 순간 휘발된다. 따라서 음향을 표현한 김환기의 그림도, 점을 순간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아침의 메아리> 04-VIII-65, ©김환기, 1965, oil on canvas, 현대화랑 제공

 산 위에 오른 남녀. 파동에 알록달록한 보석을 박은 듯한 목소리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 무뚝뚝한 남자도 뒤늦게 입을 연다. 남자는 수줍고 붉은 음성으로 짧게 내지른다. 그러면 두 사람의 목소리는 순간들에 의해 옮겨지고 메아리가 되어서 아침을 울린다. 


해석 2. 점은 인간이다. 점들이 모여서 사회를 만든다.

 사회라는 거대한 광산에 비하면 인간은 아주 작다. 그러나 그 티끌 같은 보석들이 모여 모든 집단을 이룬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1970, oil on cotton, 현대화랑 제공

 셀 수 없는 점의 무리가 감상자를 압도한다. 점들은 똑같지 않고 제 각각 다른 모양으로 웅성댄다. 곳곳으로 물감이 면직물에 번져 있다.


 무리 속 하나의 점, 한 명의 인간을 확대해서 보자. 점을 감싸는 네모는 사람의 외부로 보이는 모습이다. 격식일 수도 가식일 수도, 예의일 수도, 아니면 가치 판단을 떠나서 ‘모든 행동들’이라 할 수 있다. 행위를 상징하는 네모 안에는 동그란 점이 찍혀 있다. 원은 내면적인 에너지들의 총체, 본심, 정신, 영혼, 혹은 ‘모든 마음들’이다.


 대개는 가면 쓴 채로 네모끼리만 몸을 맞대고 산다.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곳곳에서 물감의 얼룩이 네모들 사이의 경계에 스민다. 이 난폭하고도 부드러운 번짐은 피상적일 뿐인 관계를 허문다. 얼룩 덕에 비로소 핵과 핵이 직접 서로를 어루만지며, 내면들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화합이든 갈등이든 진심 어린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때엔, 얼룩이 함께 하기를!


<무제 11-VI-74>, ©김환기, 1974, oil on canvas, 현대화랑

 역사의 흐름을 보는 것 같다. 점들이 모인 각 구획들은 어느 시대 속 사회를 가리키고, 점들 사이의 하얀 동그라미는 그 사회의 동력원을 의미한다.


 그림에는 서로 다른 개수의 동력을 지닌 네 개의 사회가 있다. 첫 번째 사회엔 자연이 덩그러니 있다. 인간은 자연만을 찬양하고 자연만을 두려워한다. 두 번째 사회엔 왕이 새로이 등장한다. 왕을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고 사람들은 기꺼이 왕을 흡사 신으로 떠받든다. 세 번째 사회로 넘어가면 평범한 인간이 추가된다. 이전까진 배제되었던 일반 대중이 사회를 이끌기 시작한다. 그리고 네 번째 실재는 돈이다. 돈이 네 번째 지배권을 갖게 되면서 자연도 왕도 인간도 모두, 살짝 아래로 끌어내려진  듯하다.


해석 3. 점은 원자(혹은 세포)이다. 점들이 모여서 인간을 만든다.

 하나의 점을 하나의 인간으로 볼 게 아니라, 점들의 무리를 하나의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무제 03-II-72 #220>, ©김환기, 1972, oil on cotton, 현대화랑 제공

 시퍼런 블라우스를 입은 광대가 분홍색 자켓의 단추를 여미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오늘은 어떤 무대에 나가서 웃을 것일까? 화려한 옷을 벗고 난 후, 무대 뒤에서의 모습도 이처럼 강렬한 색깔일까?


<10만 개의 점> 04-VI-73 #316, ©김환기, 1973, oil on cotton, 현대화랑 제공

 파란 화폭이 하얀 칼집에 의해 여럿으로 나뉘었다. 외상으로 분열된 자아를 보는 것 같다. 한 사람 안에 소리 없이 수많은 목소리들이 숨어 살고 있다. 푸르른 고통 속에서 10만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자아가  혼란스러워한다.


 이처럼 점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입각해 각 그림마다 다른 상상력을 발휘해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점은 거대한 흐름 속 하나의 존재이다. 빽빽한 흐름 속에서 하나의 점은 하찮아 보인다. 하지만 하나의 점이 모이고 모여서 흐름을 만들며, 하나의 점만 없어져도 그 공백이 흐름을 단절시킬 수 있다. 하나의 점이 흐름 속에 제 몸을 맡기듯이 흐름도 하나의 점에게 의존한다. 김환기의 그림들은 일과 무한의 조화를 일깨워준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위험한 그림은 <고요>이다. <고요>의 중앙에는 점들의 결을 변경하고 흐름을 끊는 네모난 덮개가 있다. 그 아래에 어떤 진실이 은폐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흰 테두리를 가진 덮개가 열리고 진짜 흐름이 폭로되는 순간, 고요는  깨질지 모른다.


<고요>, ©김환기, 1973, oil on cotton, 현대화랑 제공


 마지막으로, 설령 감상의 길잡이를 뚜렷하게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추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의의가 있다. 사람은 시간에 매인 존재다. 시각에 따라 행동을 바꾸며 때가 되면 죽는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를 초월하려면 시간이 정지한 듯한 감각을 알아야 한다. 거대한 추상화 앞에 서면 일시적으로나마 삶의 시간이 멈춘다. 오후 한 시와 새벽 한 시 사이의 모든 차이를 소멸시키고 고대의 얼굴처럼, 영원할 화석처럼 추상화는 걸려 있기 때문이다. 추상화에 집중함으로써 잠시나마,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필자가 디아티스트 매거진에 1월 3일 기고한 칼럼을 브런치로 옮긴 것입니다.

Cover image: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1970, oil on cotton, 현대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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