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부터 프랜시스 베이컨까지展
미술사가 이곳에서 숨을 쉰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피카소에서 프랜시스 베이컨까지>展은 대략 20세기의 작품들을 통해 근현대 미술의 변화상을 제시한다.
전시에서 소개된 거장들은 ‘포기를 통한 재창조’라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개해 나간다. 이들은 기존의 예술계가 당연시했던 요소들 – 올바른 형태, 구상, 사실, ‘아름다움(혹은 건강미)’, 직접적인 제작, 개성 - 을 작품으로부터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성을 추구했다. 제거의 결과는 결핍이 아니라, 승화이다.
1. 피카소: 형태의 포기 <여인의 흉상(1941)>, <황소 연작(1945)>
형태 자체보다, ‘보이는 그대로의 단일한’ 형태를 포기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인의 흉상> 속 주인공은 앞모습과 옆모습이 중첩되어 있다. 피카소는 정면과 측면 중 하나만이 드러나는 현실적인 관점을 포기하고 다각도로 인물을 조명했다. 이로써 피카소의 미술은 세계를 지각하는 새로운 인식론을 갖게 되었다.
또한 <황소 연작>은 자세한 묘사에 충실한 그림이 어떻게 기본적인 도형들로 변화하는가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황소는 간소한 선으로만 남게 된다. 이때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존재 이면의 뼈대, 숨겨진 물리적 진실이 나타난다. 바로, 어떤 복잡한 존재이든 단순한 원, 세모, 선 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몬드리안: 재현의 포기 <선 구성(1917)>
다음 그림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이 작품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이것이 위 질문의 정답이다. 몬드리안의 <선 구성>은 구상으로부터 탈피해 완전한 추상으로 도약했다. 그림에서 수직과 수평의 사각형들은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화면에 부유하며, 구체적인 존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몬드리안이 표현하려 했던 것이 인간의 영혼이든, 도형에 내재된 정신이든 간에, 감각적으로 경험될 수 없는 세계를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그림 위로 옮겼다는 점이 훌륭하다.
3. 샤갈: 사실의 포기 <밤의 카니발(1979)>
피카소는 현실을 왜곡했고, 몬드리안은 현실 너머를 응시했다. 그런데 샤갈은 구체적인 묘사에 비교적 충실하면서도 환상을 제재로 다뤘다. '사실'을 포기한 것이다. 전시된 그의 작품들을 보면 인간은 허공 위를 떠다니고, 상상 속의 동물과 공존하며, 색채 역시 마술적이다.
<밤의 카니발>에도 비현실적인 세계에 대한 샤갈의 애정이 깃들어 있다. 밤하늘에서 어느 소년은 달과 함께 가축을 거느리고, 푸른 얼굴의 사나이가 노란 손으로 피리를 분다. 그 옆에 머리는 새, 몸통은 인간인 형상이 꽃다발을 만지고 있다. 어두운 밤에도 꺼지지 않는 영혼들이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주인이 잠든 사이 거리로 빠져나온 집의 요정들 같기도 하다.
상단의 마을은 일상적인 반면 하단의 카니발은 판타지 세상의 파편이다. 그 대비가 인상 깊다. 샤갈은 사실적 현실을 단념함으로써 감상자의 내면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4. 베이컨: ‘아름다움’의 포기 <삼면화(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세면대를 붙잡고 있는 인물>
베이컨은 고전적인 개념의 아름다운 신체를 그만의 방식으로 파괴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화가들이 인간의 몸을 독특하게 표현해왔지만, 베이컨의 묘사는 더욱이 파격적이다.
먼저 삼면화를 보자. 신체의 부위들은 멋대로 절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면으로 분배되었다. 인간은 조립식 물건처럼 해체되었다. 3면에서는 뒤의 배경과 융화되어 물질로서의 존재감마저 소멸했다. 베이컨이 영감을 받은 희곡 <오레스테이아> 속의 절망을 표현한 것일까? 작품만 봐서는 베이컨의 의도가 오리무중이지만, 그가 인간 신체의 고귀함이나 완전함,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세면대를 붙잡고 있는 인물>에서도 육체는 요리된 닭처럼 둥그스름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술을 잔뜩 마시고 자신도 모르게 세면대에 구토할 때의 역겨움을 시각화한 것 같다.
베이컨의 그림들은 1차적으로 ‘징그럽다’는 반응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는, ‘그림은 보기 좋아야 하며 예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베이컨이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5. 뒤샹: 제작의 포기 <상자, 파리-밀라노>
뒤샹의 남성 소변기, <샘>이 미술계에 몰고 온 파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샘>은 레디메이드(readymade)다. 작가가 장인처럼 스스로 붓이나 망치를 들지 않고, 이미 완성된 공산품을 차용함으로써 직접 제작하는 과정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이로써 뒤샹은 예술의 정의 자체 – ‘무엇이 예술인가’, ‘어떠해야 예술인가’ - 를 질문하고, 현대 예술의 시초를 열었다.
전시된 <상자, 파리-밀라노>는 뒤샹의 생전 작품들을 미니어처로 모아놓은 것이다. <샘> 같은 레디메이드뿐만 아니라 <계단을 내려오는 넘버 2>, <큰 유리> 등 다른 대표작도 찾아볼 수 있다. 일종의 시각화된 자서전인 셈이다.
6. 워홀: 개성의 포기 <마릴린 먼로(1967)>
예술가에게는 그만의 아우라가 필요……한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는 예술가의 개성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을 파괴한다. 수많은 마릴린 먼로들이 색상만 바뀐 채로 나열되면서, 작가만의 고유한 예술혼이 의도적으로 상실된다. 귀중한 원본과 싸구려 복제품 사이의 위계도 소멸한다. 아트 숍에서 판매하는 마릴린 먼로 엽서와 전시장에 내걸린 실제 작품 사이엔 질적 차이가 없다. 이로써 워홀은 ‘예술가’라고 하는 하나의 신화, 미화된 주체에 물음표를 던진다.
<피카소에서 프랜시스 베이컨까지>展을 ‘포기를 통한 재창조’라는 테마로 정리했다. 피카소는 대상을 보는 단일한 관점과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몬드리안은 구상의 재현을, 샤갈은 사실적 현실을, 베이컨은 아름다운 신체를, 뒤샹은 장인다운 제작을, 워홀은 예술가의 개성을 포기함으로써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이들은 고전 미술이 본질적이라고 여겨왔던 요소들에 대해 회의하고 서양미술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3월 1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많은 이들이 놓치지 않길 바란다.
이 글은 필자가 '디아티스트 매거진'에 2월 20일 게재한 칼럼을 일부 수정하여 브런치에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