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에 대한 양가감정 그리고 영화 <미스터 노바디>
세계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아무리 위험을 선호하는 사람도,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방이 갑자기 분해돼 있는 무질서를 원하지 않는다. 도박마저도 언젠가는 돈을 따리란 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인간은 불확실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막을 형성한다. 그 보호막 안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고, 노력과 성과는 비례하며, 연속성 있는 규칙이 적용되고, 현실에서 더러 그러는 것과 달리 불시의 사고가 나지 않는다. 확실하기에 더없이 안전한 공기를 일단 제 살결 가까이 두르는 것이다.
보호막의 형태와 체계는 저마다 고유하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보호막을 상실 없는 낙원으로 꾸미고, 어떤 이는 실패 없이 성공만 하는 곳으로 설정한다. 누군가에겐 성경의 구절들로, 누군가에겐 유년기의 안식처로, 반면 누군가에겐 정신분열적 망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상이 어떠하든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모든 개인적인 노력은 보호막이다.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확실성, 안전, 안정, 예측 가능성 등등의 가치들 기저엔 완벽한 통제에 대한 욕망이 있다. 내가 원하고 예상하는 대로 세계가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 거칠게 말하면 세계를 제멋대로 먹어 삼키고 싶은 야망이 있다.
그러나 거듭, 세계는 예측을 불허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날 심장이 마비되고, 별 생각 없이 탄 택시가 사고에 휘말린다. 버스는 시간표대로 오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는 줄로 믿었던 이가 다음날 이별을 고한다. 운이 좋을 때도 있다. 평범하던 식당이 우연히 감자를 얇게 썰어 칩을 만들었다가 대박이 나고, 어쩌다 적어 낸 복권이 당첨된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불확실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얼마나 불확실하냐면 그 확률들이 전혀 공개가 안 되어 있다. 모두들 돌연하고, 갑작스럽고, 불시의 사건에 무방비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계획대로 성취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으니 제멋대로 굴 수 없다. 그러니 일단은 보호막을 설치하고, 그 두터운 관념적 껍질 안에서 위험한 세상을 두려워하며, 당장의 공허한 안전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에 나오는 알이 깨져야 하듯, 인간이 영원히 보호막 속에서 살 수는 없다. 사실 인간이 보호막 속에서 정말로 '산' 적은 없다. 왜냐하면 보호막은 실제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늘 위태로이 거기에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셀로판 막을 덧댔을 뿐 인간은 언제나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보호막이 가짜 안심만을 준다는 것, 그 허상을 깨닫고 보호막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사회의 제도와 규범을 만들거나 바꿨다. 불확실한 세계에 날 몸으로 맞선 사회의 규칙들은 확실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개인의 보호막과 달리,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대신 규칙을 지킬 것이란 공통의 상호신뢰에 바탕을 두어, 모두가 합의된 그대로 실천할 경우 세계의 불확실성은 인간의 믿음연대에 패배하고 만다. 따라서 사회구조는 세계에 대항하는 인간의 사투이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규칙을 어겨 왔다. 더 나은 제도를 위해서건, 단순히 당시의 룰을 무시했건, 그들은 불확실한 세계를 수호해 왔다. 인간은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지만 내일의 생존마저도 완벽히 확신할 수 없다.
이러니 100%인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진리도, 사랑도, 도덕도 100%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모두들 그저 100%보다 낮고 오차가 필연적인 통계적 확률들 속에서 살고 있다. 닥칠 것이 무조건 예상되는 위험은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지만,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미래는 불안을 일으킨다. 인간의 욕망과 세계의 작동 방식이 너무도 대립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안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계에 불확실성이란 속성을 부여하는 주체가, 그토록 통제를 갈망하는 인간들 자신이라는 점이다. 이 세계는 프로그래밍된 기계들이 아닌 제 의지대로 사는 인간들로 이루어졌기에 그토록 불확실하다.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확실성을 염원하는 인간은 오히려 원하는 대로 삶으로써, 그 소망들이 복잡하게 축적되어 전체의 불확실성을 초래한다.
여하간 인간은 '완벽한 통제'를 포기해야 한다. 인간이 만든 최대규모의 구조물, 사회마저 개선을 거듭해도 여전히 위험에 취약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조는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소들을 통제권 아래에 두는 성과를 이뤘다. 인간의 최선은 사회구조가 제대로 작동하리라 믿으며, 그리고 만약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파기하고 수정하며, 그마나 확실성이 증가된 영역에서 노력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너무 비관적일까?
나는 여전히 세계에 잔존하는 불확실성이 무섭다. 내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운 명제가 참이라는 게 공포스럽다. 다만 극복의 실마리를 <미스터 노바디>라는 영화에서 찾았다. 기억할 수 없는 어느 구간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다 알면 재미없다고.
모든 것이 확실하고 통제되면 재미가 없다. 나는 나의 죽음을 무서워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 알고 싶지 않다. 극도로 조마조마해하는 나마저도 전자보다 후자에 대한 바람이 크다. 고로 세계의 불확실성은, 두렵지만 어쩌면 인간이 원하는 바이다. 통제에 대한 욕망만이 인간을 잠식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 알 수 없이 추측만 가능한 것도 기대한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에서, 가장 깊고 강렬한 감정은 양가감정이라고 말했다. 통제하고 싶기도, 통제되지 않았으면 싶기도 하는 이중적인 욕망. 이 인간의 양가감정 속에 이 세계의 속성과, 사회의 구조와, 개인의 미래가 담겨 있다.
Cover image: Vassily Kandinsky, Composition 6, 1913
어쩌면 불확실한 세계와 가장 유사한 것은 예술이다. 예술은 예측될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