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일상적 투영 대상으로서의 로망]
14. 로망은, 주어진 컵에 맞게 물을 따르는 합리적 이성보다는 컵 위로 물을 넘쳐흐르게 만드는 풍부한 감정에 의존한다. 우리는 논리적인 사고 회로를 통해 “저것은 어떠하기 때문에, 이런 이유에 근거해서 낭만적이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대상이나 상황을 보거나 연상하자마자 ‘심쿵’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저건 그냥 내 로망이야”라는 ‘삘(feel)’을 받는다. 따라서 ‘sentimentally oriented conception’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와 로망은 서로 통한다. Romanticism이란 말 속에 Roman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로망의 언어]
15. 한국어 텍스트에서는 '로망'을 '낭만'으로 대체해도 맥락상 뜻이 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망’이 ‘낭만’보다 호소력이 짙은 이유는, 외국어의 신비감 덕에 지겨운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아 초성에 ㄹ이 오기 때문에 발음하는 데에 힘을 들여야 해서 강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16. 로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용되는 동사는 '깨지다'이다. "내 대학생 로망 깨졌어"나 "내 로망 깨지 마라" 등의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깨지다’의 원 뜻은 '단단한 물건이 조각나다'로, 견고한 대상이 한 번에 해체되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깨지다’란 동사가 쓰이는 대상은 딱딱하고 강하(혹은 강해 보이)면서도 실은 ‘fragile’한 것들이다.
'깨지다'의 물리적인 대상은 유리, 접시, 안경 등이다. 대표적으로 유리는 단단한 고체이지만 충격을 받으면 쉽게 조각난다. 물리적인 뜻으로부터 파생되어, ‘깨지다’는 심리적인 영역으로도 사용이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는 전혀 몰랐거나 다르게 받아들였던 일의 충격적 진상을 깨닫게 되었을 때 '동심이 깨졌다'고 말하고, 연인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 깨졌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쿠크가 깨지다’라는 문구도 생겼다. 쿠크다스란 이름의 과자는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지기 쉬운데, 쿠크다스처럼 ‘멘탈’ – 상황과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여 당황하지 않고 반응하게 해주는 정신적인 방화벽이라고 정의하겠다 – 이 외부로부터 공격받아 상처를 입었다는 의미이다.
로망 역시 깨짐의 심리적 대상이다. 로망에 '깨지다'란 동사가 사용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신의 로망은 작은 사항까지도 구체적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분자가 촘촘한 구성물이다. 이 튼튼함에 비해 로망이 깨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예컨대 신입생 오티에 대해 강한 로망을 품어왔던 학생이,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소주병들 앞에서 충격을 받는 경우를 보자. 따라서 ‘견고하던 것이 한 번에 조각나다’라는 뜻의 '깨지다'가 로망의 동사로 적합하다.
[로망의 생명력]
17. 로망이 깨졌을 때 사람들은 실망하거나 지금은 그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망 혹은 로망 실현의 지연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면 체념하기에 이른다. 이 체념은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다.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해도 로망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18. 체념, 해탈, 적대감, 학습된 무기력에도 불구하고 로망은 작은 자극에도 되살아난다. 아무리 이전에 실망했다 하더라도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면 로망은 오뚝이처럼 되살아난다.
본 글은 2014년 2학기 임혜은 교수님의 예술과 역사 수업시간에 제출했던 리포트를 수정한 것입니다. 당시 새내기였던 필자의 우울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