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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Apr 07. 2016

프로이트, <토템과 타부>

이론적 환상인가, 인류의 비밀인가



I.            이론에의 욕망

 학자는 자신이 관찰한 현상을 이론화하고자 한다. 즉, 독립적인 사태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법칙을, 공통적인 구조를, 전체를 관통하는 질서를 밝히고 체계화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상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으므로, 하나의 이론만으로 사태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개별 현상들을 하나의 이론 아래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현상의 본질이 왜곡될 수 있다. 현상을 어떤 구조의 산물로 설명하는 순간, 구조적 요인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성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론과 관련이 없는 현상들이 학자가 제시한 범주 속으로 억지로 끼워 맞춰지기도 한다.

 학자 역시 이론 - 특히 인문, 사회과학의 이론 - 은 불완전하며 잘못 적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론이 표면적으로 그럴 듯 해 보이는 것은 긍정적인 근거들만 선택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일 수 있다. 나아가 보편적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는 너무 많으며, 지금은 설명력이 있는 이론이라도 미래에 결정적인 반례가 등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스스로 부여한 질서가 진리의 비밀을 파헤치는 열쇠인지, 혹은 자의적이고 억지스러운 고집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은 역시 여전하다. 이론이 갖는 현실적인 한계와 학자 개인의 욕망은 늘 갈등한다. 프로이트 역시 이론가로서, 이론의 과학성(실제 현실과 일치하는가)과 내적 일관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토테미즘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원시인의 심리를 파헤치고자 한 <토템과 타부>에서, 프로이트는 후자를 선택한 듯 하다. 본 서평의 II에는 저서의 불완전성을, III에서는 저서가 달성한 이론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그럼으로써 <토템과 타부>를 더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II.          <토템과 타부>의 한계

 <토템과 타부>의 한계는 다섯 가지 정도로 제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책 곳곳에 등장하는 신경증 환자에 대한 설명이 과연 그들을 치료하는 데에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타부를 엄격하게 준수하는 원시인과 심리적인 규율에 집착하는 강박증 환자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강박증 환자는 (1) 자신의 강박행위의 시초를 모르며, (2) 강박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리라 믿고, (3)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상상된 파국을 방지한다. 책에 따르면 이는 타부의 (1) 기원의 모호성, (2) 어길 시 발생할 처벌에 대한 내적 확실성, (3) 예식을 통한 불행의 정화와 유사하다. 또한 프로이트는 사유의 전능성을 믿는 어린이 역시 원시인, 신경증 환자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이 셋은 모두 마음속으로 구성한 관념적 현실을 실제 사실보다 중시한다.

 그러나 원시인-어린이-신경증 환자의 연결고리를 이론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신경증을 실제로 치료하는 데에 유용한가? 이상심리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환자의 치료인데 <토템과 타부>의 논의는 학술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다. 타부가 억압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을 이야기하면서 신경증의 원인을 정신분석학적으로 규명하기는 하지만, 결국 환자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신경증 환자는 고대인과 비슷한 체질을 지녔기 때문에 문명화된 현실과 마찰한다는 가설만으로는 실제 불안과 강박증세를 완화시킬 수 없다.

 프로이트 역시 <자서전적 연구>에서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있다. “나는 토템 동물과 아버지를 등치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토템 동물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있었다.”[1] 프로이트 스스로 ‘유혹’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토템과 타부>가 엄밀한 과학성과 그에 따른 치료 효과를 의식적으로 희생하는 대신 이론적인 아름다움을 획득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두 번째 한계도 프로이트 스스로 알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원시시대에 발생한] 하나의 행위에서 비롯된 죄의식이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되고 있으며, 이 행위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세대에 있어서도 계속 작용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있다.”라고 말한다.[2] 이는‘원시성이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느냐’는 비판을 야기한다. 신경증 환자에게서 원시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려면, 원시인들의 기질과 특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되지 않고 계속 누적되어 왔어야 한다. 하지만 그 “지속”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원시인들이 실제로 사유를 전능하게 여겼고, 심리적인 현실을 사실보다 중시했다면, 그러한 사고 지침을 현대의 신경증 환자도 지닌다는 것은 설득력 있다.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이상심리학에 대한 인지적인 입장 역시 인간은 자신이 주관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세계에 살고, 신경증 환자는 자신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왜곡할 뿐더러 그 비관적 세계관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시인과 신경증 환자 사이의 이러한 공통점이 단순한 일치인지, 아니면 원시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대로부터 근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다가, 각 시대의 신경증 환자들에게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인지는 실증할 수 없다. 만약 후자의 논리가 가능하다면, 즉 신경증 환자가 정말로 '고대적인 기질'을 타고나는 것이라면, 원시성의 잔존 방식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과학의 틀로 원시성이 지속된 역사를 포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세 번째 한계는 프로이트가 근거 삼은 특수한 부족들의 사례를 통해 얻은 지식을 원시사회 전체에 일반화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특정한 부족의 속성으로부터 인류의 본질을 도출하고자 하는 모든 인류학적인 시도들이 직면하는 난제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치료 전체에 대해서도 이러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몇몇 임상적인 사례 연구를 일반화하여 인간 심리의 근본적인 구조를 간파해낼 수 있는가? 예컨대 Little Hans의 분석 사례로부터 결론 지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모든 공포증 환자가, 나아가 모든 인간이 공유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네 번째 한계는 프로이트가 근거로 제시한 프레이저의 연구들의 신빙성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본문 곳곳에서 프레이저와 그의 저작들을 위대하다고 표현하며 신뢰를 드러낸다. 그러나 조너선 스미스를 필두로 프레이저에 대해 비판이 가해져 왔으며, 프레이저의 문헌들이 지니는 설명력은 현재 크게 인정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프레이저의 자료를 근간으로 세워진 프로이트의 논의 역시 위태로워진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설령 프레이저가 범한 오류를 알았더라도 논지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로버트슨 스미드에 대한 비판에 대응한 방식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희생제의를 토테미즘 및 부친 살해와 연관시켜 설명하면서, 로버트슨 스미드의 연구 결과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런데 로버트슨 스미드의 가설이 민속학자들에게 거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내용의 수정을 거부했다. “천재적인 인물인 로버트슨 스미드의 저술은 나에게 분석의 심리학적 소재와 가치 있는 접촉점을 제공하며 그것의 채택에 합당한 지표들을 갖고 있다. 나는 그의 반대자들과 동일한 근거에 설 생각이 전혀 없다”[3]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가정과 부합한다면 스미드의 연구를 지지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뜻을 내비친다. 이를 통해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에서 엄밀한 과학성보다는 내적 일관성과 정신분석학의 확장 및 활용을 더 중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자신의 전제와 일맥상통하는 근거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였을지 모른다. 다행히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고 이후의 저서들을 통해서 자신의 이론이 오류가능함을 인정하고 있다.


III.         <토템과 타부>의 이론적 아름다움

 앞서 한계들을 신랄하게 지적했으나 <토템과 타부>의 의의 역시 엄청나다. <토템과 타부>는 ‘아름다운 이론’의 결정체이다. 아름다운 이론이란 (1) 내적으로 일관되고, (2) 풍부한 근거에 기반해 있으며, (3) 대담하며 도전적이고, (4)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의 범위가 넓으므로 다른 분야로도 적용시킬 수 있는 이론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먼저 <토템과 타부>는 원시인들의 생활을 규제했던 토테미즘과 타부 제도를 ‘정신분석학’이라는 일관된 틀 안에서 해석한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토템을 만든 이유가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을 처벌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신경증 환자들이 아버지를 제치고 어머니를 차지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무의식 중에 방어기제들을 발동시킨다는 설명과 통한다. 타부가 어떤 것을 금지하는 이유는, 그것을 너무 저지르고 싶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양가감정’과 맥락이 같다. 원시인들이 갓 죽은 이를 악령으로 여기고 기피하는 것은 타인의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만족감을 악령에게 투사한 것으로 분석되는데, 투사는 정신분석학에서 대표적인 방어기제이다. 이처럼 원시적인 사회제도 – 그 배후에 있는 원시인의 무의식 – 와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둘째로 <토템과 타부>의 주장들은 근거로 하는 자료의 양이 방대하다. 책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기나긴 참고문헌 목록과 본문에 빈번히 등장하는 인용들은 프로이트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분석한 뒤 이 책을 저술했는지 암시한다. 그는 인류학적인 선행 연구뿐만 아니라 임상적인 자료, 원시 신화, 종교학 논문 등을 탐독함으로써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논지를 강화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의 틀에 부합하는 자료들 위주로 선택되었다는 문제는 남아 있다.


 셋째로 <토템과 타부>는 용기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곳저곳 뻔뻔한 곳도 보이지만(예컨대 로버트슨 스미드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 반응) 그는 한 시대에 국한되는 인간의 특징이 아닌, 시간과 무관한 인류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포부를 내비친다. 프로이트의 고찰은 원시부터 현대로까지 이어지는 고대적 기질의 지속성을 강조함으로써 통시적이다. 동시에, 과거에 다양한 원시사회들에게 공통적이었던, 그리고 현대에 다양한 신경증 환자들에게 일반적인 기질의 ‘공유’를 피력함으로써 각 시기에 대하여 공시적이다. <토템과 타부>에서 프로이트가 보인 대담함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류 전반을 겨냥한다.


 마지막으로 <토템과 타부> 그리고 관련된 정신분석학적인 논의들은 심리학과 종교학, 인류학의 영역 너머로도 설명력을 지닌다. 좋은 이론은 원래 설명하고자 했던 현상뿐만 아니라, 응용과 활용을 통해서 아예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도 설명해낼 수 있다. 정신분석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넘나들며 적용 및 심화되었으며, 인류의 지성사에 한 획을 그었다. <토템과 타부> 역시 확장된 설명 가능성을 갖는다. 현대의 자기 성애(auto-eroticism)는 예술가들에게 나타난다고 주장한 부분과 그리스 비극을 비평한 부분은 미학적인데, 이는 이 책이 지닌 확장에의 잠재력을 암시한다.


IV.         프로이트의 선택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는 과학적인 엄밀함을 일부 포기하고 불완전성을 의도적으로 안고 가는 대신, 이론적 아름다움을 획득한 책이다. 따라서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토템과 타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작업을 II과 III에서 진행하였다. 기억할 것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이 맹목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자신 역시 일종의 ‘선택’을 했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 선택의 결과로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를 통해서 이론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환상미(幻想美)를 끌어올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론이 현실과 놀랄 만치 맞아떨어진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학문의 대상으로서의 인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제 비밀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지적인 상상력은 높이 살 만하며 <토템과 타부>는 언제, 어디서 읽어도 가치 있을 작품이다.


      

[1] <프로이트와 현대성: 국왕 살해와 부친 살해>, 김종엽, 1995에서 재인용

[2] <토템과 타부>,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종엽 역, 1995, 문예마당, pp. 225~226

[3] 위 책, p.254에서 재인용


Cover image: Henri Rousseau, Snake Charmer, 1907

본 글은 2015학년도 2학기 방원일 교수님의 원시 종교 수업에 제출된 서평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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