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라이트: 악마는 있다>, <고야의 유령>
종교적 현실의 주인공은 인간
종교는 인간만의 현상이다. 따라서 종교적 현실은 인간 존재[1]가 처해 있는 본질적인 긴장을 담아낸다. 신을 믿는 인간은 '피투(被投, 환경 및 배경에 내던져짐. 예를 들어 인간이 어떤 부모 아래서 태어날지는 결정할 수 없음)'와 '제작(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나감)'의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뒤에서 분석될 두 영화에 드러난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창조주에 의해 세상에 내던져진다. 즉 스스로의 탄생을 거부할 수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있음 당하는’ 것이다. 삶의 이러한 피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주체적인 선택에 직면해 있다. 자신이 태어난 이후의 모든 순간에 인간은 신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자율적인 생존을 위하여 문명과 사회를 건설했다.
영화 <더 라이트: 악마는 있다>(이하 <더 라이트>)와 <고야의 유령> 모두 기독교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탄생과 만남은 피투이거나 그에 가까운 우연의 산물이다. 신은 이러한 상황만을 던져놓고 무대 아래에서 관조할 뿐, 이야기를 실제로 진행하는 주역은 인간이다. 따라서 두 영화의 종교적 현실 속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설명에 대한 인간 욕망의 산물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욕 등의 생리적인 필요는 삶을 지배한다. 인간의 일상은 그러한 욕구들의 절제 및 충족의 제도화된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인간이 생리적인 욕구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꼭 수호해온 지적인 욕구가 있는데, 바로 설명에 대한 욕망이다.
설명이란 “왜?”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 내놓는 답변이 진실한지와 무관하게 인간은 현상의 원인을 찾고 싶어 한다. 새롭거나 견디기 힘든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 이유를 찾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으로 현상을 편입시켜야, 이전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과 허무주의에 휩싸인다.
따라서 인간의 각 시대는 고유한 설명 체계를 제도화해 왔다. 서양의 경우 중세와 초기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이 설명의 욕구를 해소해주었다. 천체와 생물은 왜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왜 죽는가?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극히 신비로운 사실들의 원인에 대해, 종교는 일관적인 답변을 제시해주었다. 게다가 신성은 실증할 수 없는 만큼 완벽히 부정할 수도 없다. 그 덕에 신에 대한 사유는 현실적인 제약을 받지 않았고 종교는 많은 현상에 적절한 설명을 해낼 수 있었다. 모든 원인을 신에게, 인간이 확인할 수 없는 영에게 돌리면 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종교는 인간의 설명에 대한 욕망을 성공적으로 충족시켜왔다.
종교와 믿음으로써 세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성의 중요성이 담론화되면서, 또 과학적인 지식이 축적되면서 종교를 가진 사람만의 것으로 밀려났다. 현대 사회에서는 중세시대와 다르게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모두를 설득할 수 없다. 역으로 포이어바흐의 이론처럼 인간이 신을 상상해서 만들어냈다는 주장마저 팽팽한 지금, 종교의 설명 효과는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현상에 맞닥뜨렸을 때 종교 대신 과학의 힘을 빌린다. 예컨대 전염병이 돌면 신이 저주를 내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더러운 위생으로 인해 특정 세균이 번식하기 쉬워져서 병이 창궐했다고 말한다. 나아가, 예배나 제사를 통해서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의학적 처방을 선호한다.
그러나 여전히, 과학에 의해서도 규명될 수 없는 현상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도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종교가 다시 설명의 수단으로 채택된다. <더 라이트>에 등장한 퇴마 의식이 그 예이다. 영화 속에서는, 정신의학이 문제의 진단과 처방에 실패하자 종교가 그 자리를 채운다. 이성으로써 과학적 검증이 가능한 질환이 아니라, 믿음으로서만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악마'가 이상행동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왜 저 사람은 기이한 언행을 일삼는가?”라는 질문에 과학이 아니라 종교가 답변해주는 것이다.
▲<더 라이트: 악마는 있다>의 포스터
<더 라이트>는 실화를 반영했으며 퇴마 의식은 실제로도 벌어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즉 “왜?”에 답하고 알맞게 대처하기 위해 퇴마를 부탁한다고 한다. 따라서 설명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서의 종교 개념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더 라이트>에서 종교는 설명의 수단이지만, 먼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고야의 유령>에서 종교는 설명의 목적이 되어버린다. 이때 종교는 “왜?”들에 답변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된다. 모든 현상은 종교라는 틀 안에서만 해석돼야 했으므로 다른 설명 수단은 배제되었다. <고야의 유령> 속 세계관에서는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만이 유일한 설명 방식이었으며, 다른 대답들은 이단시되었다. 동일한 신을 믿는 유대교마저 배척의 대상이었는데 이는 유대교 의식을 수행했다고 의심받아 인생이 망가진 여주인공 이네즈를 보면 알 수 있다.
▲<고야의 유령> 포스터.
종교가 인과관계 규명의 수단일 때에는 다른 수단들과 공존할 수 있다. <더 라이트>의 사회에서 퇴마의식과 정신의학이 공존하듯이 말이다. 또 이 경우에 인간은 어떤 답변을 채택할지 주체적으로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종교의 배타성이 증폭되고 인간은 설명 방식을 선택할 권리를 빼앗긴다. <고야의 유령>에서 볼테르를 읽는 것이 금지된 것처럼,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관조하는 신과 행동하는 인간의 듀엣, 종교학
정리하자면, 인간은 종교를 설명의 도구로 선택하기도 하는 반면 종교에 종속 당해 다른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에 던져지기도 한다. 인간이 이렇게 주체성과 피투성, 즉 자력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과 타율적으로 세계에 ‘있음 당하는’ 것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신의 역할은 관조이다. <더 라이트>에서 퇴마 의식을 직접 수행하는 것은 인간이고, <고야의 유령>에서 로렌조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도 그를 사형시키는 것도 인간이다. 두 영화 모두 ‘신의 뜻에 따라’ 인간이 행동한다고 묘사하지만 신의 뜻 역시 인간의 해석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퇴마 과정에서 신부가 내뱉는 말은 성경의 구절들인데 성서 역시 인간이 서술했다. 결국 종교적 현실의 주인공은 인간이며 신은 매우 소중한 관객이다. 관객은 입장함으로써 연극을 개막할 수 있어도 무대 위로 올라올 수는 없다.
따라서 '세상'이란 무대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는 인간의 자유에 달렸다. 두 영화를 통해 신은 인간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대신 관조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조하는 신은 신학이 아닌 ‘종교학’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전제이다. 신학에서의 신은 관조자 그 이상이지만, 종교학에서의 신은 초점의 주변부에 있다. 신은 인간으로부터 믿음을 얻어야만 종교학의 관심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왜냐하면 종교학은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며, 종교적 행위와 선택친화력을 지니는 의식 및 문화를 탐험하는 '인간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신은 지켜볼 따름이기에 종교학자가 인간에 집중할 조건들이 마련된다. 엄밀히 말하면 종교학의 존재는 신이 ‘실제로’ 관조만 하는지와 무관하다.
이렇듯 종교학은 신의 관조를 전제하기 때문에 신이 절대적으로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신이 있더라도 지켜보기만 한다면, 없는 것과 현상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 “있는데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유신론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그 누구에게도 만족스러운 종교학적 답변이 되지 못한다. 또한, 종교적 현실 속에서 신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간의 믿음인데, 신앙은 신의 관조와 무관한 주관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하나의 인간에 의해 신은 언제든 존재될 수 있고 또 언제든 폐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문제는 신학의 영역이지, 인간을 연구하는 종교학의 질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학은 피투와 신의 관조라는 실존 조건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종교적 현실을 제작하는가를 탐구한다. 인간은 신에게 어떤 속성이 있다고 믿는가, 자신의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의례를 고안했는가, 사후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등등을 규명한다. 신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가, 신을 받들기 위해 어떤 의례가 수행되어야 하는가, 사후세계는 실제로 어떠한가는 종교학이 해명할 과제가 아니다. 후자의 질문들은 관조 이상으로 인간사에 개입하는 신을 전제하는 신학적 문제이다.[2]
종합 및 결론
위의 이야기를 토대로 두 영화 속의 종교적 현실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요약하자면 두 영화는 다음을 뒷받침한다: (1) 인간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수단과 목적이 도치되면 종교를 위해 현상을 끼워 맞추기도 한다. (2) 종교적 현실이란 무대에서 주인공은 인간이고, 신은 관객이다. (3) 신의 관조는 (특히 기독교에 대한) 종교학적 연구의 전제이다.
신이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면 이에 대해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신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거나, 반대로 인간의 자유로운 영역이 생겼음에 해방감을 느끼거나 둘 중 하나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반응 이후로 이어지는 인간의 주체적인 행동이다. 인간은 피투와 제작 사이를 상시 왕복하며 신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종교적 현실 위에서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이때 피투로부터 무력감과 무의미함을 느낄 것인가, 아니면 제작으로부터 창조의 희열을 느끼고 자유를 만끽할 것인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렸다. 필자는 후자의 중요성이 전자를 훨씬 앞지른다고 생각한다. 피투는 신의 몫인 반면 제작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사건에 낙담하는 것보다 자신이 변경할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낫다. 종교학은 이러한 인간의 세계 제작 능력에 대하여 무한한 관심을 보이는 학문이다.
[1] 본 글에서의 인간은 기독교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유일신을 믿는 인간이란 의미로 사용하겠다.
[2] 이 맥락에서의 신의 관조와 ‘종교학’은 기독교를 연구하는 학문을 떠올릴 때 가장 의미 있다. 동양의 종교 개념, 예컨대 유교나 도교에서도 ‘신의 관조’라는 전제가 기독교와 같은 맥락에서 통할지에 대해선 더욱 깊은 종교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언급했듯이 만약 신적 존재가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라면 인간의 현실 내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그 결과적 효과가 동일하고, 유신론자들의 설명을 빌려 설령 신의 힘이 인간사에 개입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반영의 직접적인 주체는 인간이다. 따라서 절대신을 믿지 않는 종교의 존재도 관조하는 신과 양립할 수 있다.
※이 글은 2015년 1학기 방원일 교수님의 '세계 종교' 수업시간에 제출된 리포트를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글은 필자가 디아티스트 매거진에 4월 1일 게재한 칼럼을 브런치로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