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헬싱키는 주위에 가까운 섬들과 잘 조성된 공원이 조화를 이루어 그림처럼 예쁜 해변 도시이다.
도시는 생각보다 작아 이틀 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 가 볼만한 곳은 다 훑어본 상태였다.
헬싱키틑 벗어나 지방의 작은 도시를 가볼까 생각하다가 계획을 바꾸어 에스토니아 수도인 탈린을 가기로 결정했다. 헬싱키에서 탈린 까지는 85Km 거리로 페리를 이용하면 두 시간 거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차나 버스로 지방도시에 가는 것 보다도 짧게 걸린다.
오전에 출발하면 탈린을 관광하고 오후에 돌아오는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게다가 당일 왕복 티켓을 사면 요금이 대폭 할인된다.
헬싱키에서 탈린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여러 개의 회사들이 두 곳을 오가는 크루즈를 운항하고 있고, 승선하는 터미널도 여러 곳이 있다.
내가 이용한 탈린크 실야 라인(Tallink Silja Line) 차세대 고속 페리는 길이가 200m가 넘고, 2800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마치 초대형 호텔을 통째로 바다 위에 옮겨놓은 것 같았다.
실내에는 식당, 카페, 오락실, 기념품 가게, 면세점, 헤일수 없이 많은 객실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실내장식이 세련된 한 식당에서 호밀빵과 생선요리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후, 갑판에 나가니 저만치 탈린의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여행을 한 후에 뒤돌아보면 꿈이었나 생각되는 곳이 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꿈속에서 보고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유네스코 세게 문화유산에 등재된 탈린의 구시가지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발트해의 진주라 불리는 탈린은 북유럽에 남아있는 중세 도시다.
유럽 어느 나라를 가도 고도는 많지만 탈린처럼 구시가지 전체를 완벽하게 보존한 곳이 흔치 않다.
회색의 성벽과 뾰족한 탑, 흰 벽을 가진 사원과 교회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800년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시청사가 있고, 박물관, 성 올라프 교회, 시립 박물관, 라에코야 광장,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 톰페아 성, 덴마크 왕의 안뜰........
볼거리가 무진무궁하다.
에스토니아는 13세기부터 외부세력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어두운 역사가 7세기 동안이나 이어졌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세기에 걸친 투쟁은 1991년 8월 완전한 독립국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인명 피해도 많았다. 구 소련 공산당 치하에서 6만 명 이상이 학살당하거나 이주 또는 추방되기도 하였다. 2차 세계 대전으로 4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묵묵히 지켜봤을 건물들은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마음에 깊이 품어두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는 것 같았다.
탈린은 인구 41만 명 정도의 크지 않은 도시이다.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구시가지 구역은 페리 터미널에서 가까이 위치해 있고, 그리 넓지 않아 보도로 둘러보아도 피곤하지 않을 정도이다.
고풍스러운 역사적인 건물 사이로 여기저기에 뻗어있는 좁은 골목길들,
걸어도 걸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 길을 따라가면 저만치에 무엇이 나를 반겨줄까 하는 호기심과 설렘만
마음에 가득 채워진다.
탈린이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시의 철저한 통제 때문이다.
보수를 할 때나 개조를 할 때도 시의 방침을 철저히 따라야만 한다.
마음대로 못질 한번 할 수 없고, 페인트 색 하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조금만 오래된 건물이면 낡은 것,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허물어뜨리고 새 건물을
쌓아 올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닐까?
구시가지 중앙에 있는 라에코아 광장(탈린 시청 광장)에는 식당과 카페들이 즐비했다.
나는 한 노상 카페에서 허니맥주 한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고풍스러운 건물에 에워싸여 있는 광장엔 오가는 많은 관광객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고, 전통복장을 한 음식점의 종업원들이 목청껏 소리 질러 호객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중세시대의 무대에서 스펙터클한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 같았다.
나는 관중 속에 한 몸이 되어 그 장엄한 장면을 지켜보며 천천히 맥주를 들이켰다.
멋진 분위기 때문일까(?) 달달한 맥주는 갈증과 피로를 단박에 날려버렸다.
여행을 하는 내내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지?
분명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빨간 지붕의 수도원, 교회건물의 높은 첨탑,
거칠고 단단한 돌을 심어놓은 좁은 골목길,
중세의 복장을 하고 공예품, 기념품을 팔거나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상인들을 보면서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되돌아가 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