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폼페이와 카프리섬이었다. 서기 79년에 베수비오산의 분화로 시간이 멈춰서 버린 폼페이의 옛 모습이 보고 싶었고,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카프리섬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두 곳은 나폴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폼페이는 기차나 버스로 30분 거리이고, 카프리섬은 베베렐로 항에서 유람선을 타면 30분 거리였다.
가고자 하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만만찮은 교통비와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기분이었다.
나폴리도 가보고 싶은 곳의 하나였으므로 이건 일타쌍피가 아니라 일타 세 장이 피였다.
로마에서 고속 기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인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1순위가 카프리섬이었기 때문에 망서리지 않고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카프리섬 마리나 그란데 항에는 관광객들의 행렬이 대목을 맞은 시장처럼 북적거렸다.
나폴리와 소렌토로부터 물살을 가르며 달려온 유람선들은 쉴 새 없이 관광객을 토해내고 있었고, 선착장에는 요트며 보트, 크고 작은 유람선이 빼곡히 정박해 있었다.
섬을 한 바퀴 일주하는 게 제일 먼저 할 일이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대형 유람선을 선호했지만 나는 우리 가족(아내, 두 딸)만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어 작은 보트를 선택했다.
보트의 선주는 평생을 배를 타는 일로 살아온 듯 햇볕에 그을리고 다부진 몸매를 지닌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가족을 위하여 꽤 신경을 써주었다.
기암절벽이 나타나면 배의 속도를 늦추어 잘 볼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우리가 다른 곳에 시선을 주고 있으면 해이하며 손가락으로 어느 목표 지점을 가리켜 주었다.
카프리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파란 동굴이 나타나자 그는 안을 자세하게 볼 수 있도록 깊숙한 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관광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동굴을 보기 위해 찾는다고 한다.
푸른 동굴의 입구는 너비가 2m 정도로 굉장히 좁았다. 소형 보트도 간신히 들락거릴 수 있는 넓이였다. 높이는 얼마나 낮은 지 머리를 최대한 숙인다든가 아니면 뒤로 눕다시피 해야 했다.
대형 유람선을 이용하여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작은 보트에 4-5명씩 나누어 타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동굴에 들어서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바닷물 색 때문이다. 너무 신기하고 신비로운 색이다. 그림을 전공한 나도 이 색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옥색, 하늘색, 파란색을 섞은 물에 고은 형광색을 풀어놓은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동굴 안의 길이가 60m 너비는 25m쯤 되는 작은 곳이며, 머무르는 시간이 채 5분이 안되었지만 그 어느 장소보다 인상적이었다.
보트의 선주는 우리 가족이 무료할까 봐서인지 틈만 나면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태리 민요들이었는데, 그 곡들 중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미오, 산타루치아 같은 곡도 섞여 있었다.
아내와 나는 허밍으로 혹은 우리나라 말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선주의 노래 솜씨는 대단했다. 풍부한 성량, 맑은 음색, 반주가 있었다면 잘 알려진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고 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노래 선물은 우리의 여행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이태리 사람들은 누구나 노래를 잘한다더니만.......
오래전에 이태리로 성악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났던 한 지인이 있었다. 중. 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큰 꿈을 안고 30대 중반에 용기를 낸 것이다.
몇 년 동안 열심히 배우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떠났던 그가 채 일 년도 안되어 돌아왔다.
공부를 포기한 이유는 도통 자신감이 생기질 않더란다. 학생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주위 사람들, 심지어는 거리를 떠도는 집시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도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훌륭하더란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감이 회복되겠지 생각했는데 시간은 그에게 주눅만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아 놓더란다.
보트 선장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지인의 심정을 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친절한 보트 선주의 안내로 카프리섬 일주를 마치고 우리 가족은 푸니쿨라라는 미니 기차(?)를 타고 가파른 선로를 따라 이 섬의 중심지인 움베르토 1세 광장에 올랐다.
이 광장은 카프리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발길 닿는 곳마다 개성 있게 꾸민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고급스러운 브랜드와 장인들이 정성 들여 만든 수제 제품들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바라보느라 정신 팔려 있는데 누군가가 바삐 다가왔다. 섬 일주를 해 주었던 보트의 선주였다. 계산이 잘못됐나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운임 외에도 충분한 팁까지 주어 그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온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우리에게 이곳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우리와 헤어진 후 생각하니 음식점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서 곧바로 뒤따라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가족을 음식점 앞가지 안내해 주었다.
그의 배려가 고마워서 마음이 훈훈해졌다.
우리는 보트 선주가 안내해 준 음식점에서 조개를 넣어 만든 봉골레 스파게티와, 토마토소스, 허브로 오븐에 구운 모짜렐라 치즈와 감자만두인 뇨키 알라 소렌티나를 먹었다.
처음에 음식이 나왔을 때는 양이 많은 것 같았는데 먹다 보니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싹싹 비웠다. 맛집에 오면 입은 즐겁지만 배(위)는 고생이다.
카프리섬은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아나카프리(Anacapri)와 카프리(Capri)다.
이번 여행에서 아나카프리는 제외시켰다. 그래야 다음에 또 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니까.
우리는 아우구스토 정원을 찾아 예쁜 꽃들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기도 하고, 발아래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눈이 아플 때까지 바다를 담고 또 담았다.
이탈리아는 어느 지역을 가도 감탄과 찬사가 절로 나오지만, 까마득한 로마시대부터 황제, 귀족, 예술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고, 지금도 세계적인 부호들이 벼랑 위에 세워진 그림 같은 별장에 찾아와 휴가를 즐기는 카프리섬이 가장 머릿속에 또렷이 남을 것 같다. 천국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카프리섬의 보석같이 빛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보트 선주의 따뜻한 배려, 그리고 그가 불러준 노래 선물은 세월이 흘러도 감동으로 일렁이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