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경험하거나 목격해서 기가 막힐 때, 우리는 흔히 어처구니없다는 말을 사용한다.
살면서 크고 작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수도 없이 겪지만, 심한 경우에는 마음의 상처가 된다. 외상을 입으면 약을 바르고 관리가 편해 치료가 쉽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상처는 약도 없고 쉽게 아물지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도 하지만, 충격이 심한 경우에는 그 상처가 영원히 남는다.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후배가 있다. 우리나라의 한 미술대학에서 판화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다시 학사과정은 Visual Communication을, 석사과정은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수시로 그룹전에 참여했고 몇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주로 한지를 이용한 작품이었는데, 교수나 미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얻었고, 컬렉터들이 고가에 작품을 매입하기도 했다.
한국에 귀국해서도 후배는 꾸준히 작업을 했고, 전시회를 통하여 자신을 알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시를 할 때마다 비평가와 관람객들로부터 작품이 독창적이다. 예술성이 높다는 평과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8년 전, 그에게 큰 기회가 쥐어졌다. 수도권의 한 지역에 신축 중인 성당 내부를 장식하는 작업을 맞게 된 것이다.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 신부와 관계자들이 연락을 취해 몇 차례 미팅을 가졌다. 그들은 후배의 계획안을 꼼꼼히 검토하고, 작품제작 모든 과정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 시연하는 것을 지켜본 후 최종적으로 OK사인이 떨어졌다.
후배는 한지 작업으로 실내를 꾸미기로 했다. 한지(종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기에 약하고, 쉽게 찢어지는 재질이라고 알고 있지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전통 한지는 놀라울 정도로 단단하고 수명이 길다. 비단천은 수명이 500년이지만, 한지는 천년이라고 한다.
한지를 이용해 성당 내부를 장식하는 작업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특별한 것이었다. 세계에서도 전례가 없는 초유의 작업이었다.
후배는 작업에 돌입했다. 작품의 특성상 두 가지 방법을 병행했다. 단순하고 약간의 추상적인 형상은 목재를 정과 끌, 조각칼로 파내고 다듬어서 한지로 찍어냈고, 사실적인 형상은 점토로 만들고 석고액으로 틀을 만들어 한지로 떠냈다.
점토 작업은 크기가 워낙 방대했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서 전문적인 조각가와 몇 명의 조수들을 작품제작에 투입시키고 선두지휘를 했다.
외진 곳에 위치한 넓고 허름한 작업실은 여름에는 한증막으로 변해 땀으로 범벅이 되게 만들었고, 겨울이면 실내에 물이 얼 정도로 추웠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침에 눈을 뜨면 작업을 시작하여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 때문에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보기 위하여 자주 찾을 수도 없었다.
외줄에 매달려 고통과 사투를 벌이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후배는 오직 한 가지 바람으로 견뎌냈다.
혼을 불어넣어 만들어진 자신의 작품이 성당에 영원히 보존되어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위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르메니아의 에치미아진 성당이나 유럽의 중세 시대에 세워진 많은 성당들처럼 오랫동안 보존을 할 수 없더라도 몇 백 년은 잘 관리되어 자신의 작품이 그대로 있기를 바랐다.
3년 반 만에 한지작업은 끝이 났고. 작품들을 운반해 성당 안에 설치가 완료되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성당을 찾았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신비스러운 세계가 펼쳐졌다. 온통 흰색의 공간이었지만 차가운 느낌이 아니라 한지의 영향으로 온화했다. 벽면 한쪽에는 정갈한 옷을 입은 81명의 신자들이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는 모습과,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을 형상화시킨 부조 작품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느 부분은 인물들을 단순화시켜 반추상으로 표현했고 어느 부분은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거대한 한 벽면이 마치 한 작품인양 인물들의 배열이 조화로웠다.
정면에는 한지로 만들어진 십자가와 예수상이 매달려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유럽의 많은 성당을 드나들며 보았던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함보다 더 엄숙하고 경건하게 만드는 강한 힘이 있었다.
몇 년이 흘렀다.
후배는 여전히 작품을 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전시회를 하느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후배는 짬짬이 나를 찾아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며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후배는 어두운 얼굴로 나를 찾았다. 뭔가 심각한 일이 있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꺼낸 말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실내를 장식한 성당에 관한 소식이었다.
원래 있던 신부가 다른 성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새로 신부가 왔는데 내부 공사를 강행하였단다. 그런데 후배의 작품이 설치된 벽면에 대형 창문을 두 곳이나 만드느라 작품이 크게 절단되었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설치한 작품을 불과 5년 만에 훼손시켰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조그만 작품 한 점도 소중히 관리하고 보호해야 할 성당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신부 임의대로 훼손시켜도 되는 것일까?
작가에게는 작품은 분신이다.
작품을 남의 손에 넘기면 시집보낸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한다. 시집간 딸은 오래오래 사랑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에드바르트 뭉크는 작품을 파는 것조차도 극도로 싫어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없이 작품을 타인에게 넘기게 되면 똑같은 작품을 제작하여 보관할 정도였다.
후배는 성당 내부를 설치하느라 오랜 시간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이 잘 관리되어 100년이 흐르고 200년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과 호흡하기를 바랐다.
후배의 충격은 얼마나 클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
아마도 몸 한 부분이 잘려 나간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입은 상처라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계속될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