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란을 위하여 수 천리 수 만리 물길을 헤엄쳐 고향을 찾는 연어들을 영상으로 보았다.
거친 물결을 만나고,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폭포를 거슬러 오르고, 낚시꾼에 잡히기도 하고, 곰이나 여우, 독수리의 먹이로 희생되면서도 연어들은 고향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70- 90cm 크기의 물고기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용기와 힘을 가질 수 있고, 더욱이나 수천 km 떨어진 바다에서 5 – 6 년을 살다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찾아 올 수가 있을까?
어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후각이 발달하여 자신이 태어난 강물의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연어처럼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나도 연어처럼 회귀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고향의 냄새가 그립고, 찾아가고 싶어 근질근질 해지곤 한다.
변화의 바람이 훑고 지나간 고향은 내가 살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는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거나 자식을 따라서 도회지로 떠났다.
간간이 누워있던 오래된 집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섰다.
달라진 풍경은 낯설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처럼 느껴진다. 엉뚱한 곳을 찾아와 고향이라고 억지 부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살았던 집은 오래전에 사라져 집 터 조차 가늠이 안된다. ㄱ자의 안채와 ㄴ자의 바깥채가 있고 안뜰에는 잘 가꾸어진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진 화단과 지하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 시설이 되어있는 제법 반듯한 집이었는데 도통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조차 없다.
방풍림처럼 집 뒤로 길고 넓게 자리 잡았던 울창한 대나무 숲도 어디쯤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얀 눈이 수북하게 대나무 숲에 내려앉으면 풍성한 흰 꽃을 핀 것 같이 운치 있었고, 실바람에도 잎들이 부딪치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귓속말처럼 꽤나 정겨웠었는데…..
달 밝은 밤 대나무 숲의 잎새들이 창호지를 바른 내 방의 뒷문에 그림자를 만들어 흔들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었다.
5 ~ 6월이면 연보라색 꽃을 피워 나무를 가득 덮고 짙은 향기를 풍기던 수령이 오래된 오동나무와, 늦가을 서리가 내릴 때면 잎을 모두 떨군 가지마다 노랗게 익은 고욤들이 닥지닥지 무겁게 매달려 있던 나무가 서 있던 장소도 가늠할 수가 없다.
고향에 가면 어머니를 만난다. 오래전에 하늘나라로 소풍을 떠나셨지만, 내가 어렸을 때의 그 모습으로 옛집에 먼저 와 계신다.
어머니는 옹기점처럼 크고 작은 독들이 즐비한 장독대를 반질반질 윤이 나게 행주질을 치시고, 맑은 날에는 장독 뚜껑을 열어 햇빛을 넣어주고 파란 하늘도 담으셨다.
집 안뜰과 밖에 있는 화단에는 계절에 따라서 피고 지는 꽃들이 색동천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꽃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많은 시간을 화단에서 보내시곤 하셨다. 쪼그려 앉으시던가 허리를 숙여 꽃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시고 피어난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는 꽃들과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는 것 같았다.
고향을 찾으면 어릴 적 같이 놀던 조무래기 친구들과 조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반백이 되어 어디선가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겠지만, 옛날 철부지 시절 모습 그대로이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고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싱아를 꺾어 새콤달콤한 맛을 보고, 산딸기를 따서 먹고, 뽕나무에 까맣게 익은 오디를 따먹느라 손이며 입안이 까만색으로 물들기도 했다.
딱지치기, 공차기, 말 타기, 자치기, 구슬치기, 연날리기, 썰매 타기를 하다 보면 하루해가 노루꼬리만큼 짧았다.
우리에게는 바다도 큰 놀이마당이었다. 밀물이어서 물이 가득 차면 빨가벗고 뛰어들어 수영하고 물장구치느라 정신 팔렸고, 썰물이어서 물이 빠지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서 또 다른 놀이가 이어졌다.
머리 위에 돌출된 두 눈을 가지고 팔짝팔짝하는 짱뚱어를 쫓고, 햇빛을 즐기려 집에서 나온 능젱이, 황발이(농게)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바다 다슬기를 줍고 까막 조개를 캐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얼굴이며 옷에 갯벌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는 그 모습이 우스워 서로 얼굴을 보며 키득거렸다.
고향 방문 중에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아픈 기억이 있다.
10여 년 전, 형님이 간암 말기여서 마른 풀잎처럼 시들어 갈 때, 고향을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형님은 막내인 나를 끔찍이 아껴 주셨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용한 한의원에서 보약을 지어 보내주시고, 집안에서 시원하고 편하게 지내라면서 한산 모시로 만든 개량 한복을 보내주시던 자상한 분이셨다.
형님은 사업을 하느라 바쁜 생활로 고향을 잊고 사셨는데 아마도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형님은 고향의 향기를 맡으려는 듯 킁킁거리기도 했고 아련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나는 조카, 조카딸과 함께 겉으로는 웃고 마음으로 울면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고향은 슬픔을 안고 찾아도, 상처 입은 짐승처럼 고통을 안고 찾아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도 항상 어머니 품속 같은 포근함으로 다독여주고 휴식과 위안을 준다.
옷을 갈아입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고향이지만, 나는 마음의 안정과 위로가 필요할 때,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고 회귀하는 연어처럼 그곳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