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준 May 29. 2024

비디오테이프와 대여점에 관한 추억



책장 깊숙한 곳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그것도 셋이나 있었다. 2010년대 초에 책장을 정리하면서 모두 버렸는데 뜬금없었다. 실수로 깨끗이 정리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기념으로 몇 개를 남겨놓았던 것인지 기억이 연결되지 않았다. 신기한 물건을 발견이라도 한 듯이 손에 들어 하나하나 확인했다.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인어공주였다. 모두 월트디즈니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두 딸이 어렸을 때 애정했던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일부러 보관한 확률이 높아 보이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억력이란 까마득한 옛날일을 눈앞에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려 주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오래되지 않은 일도 정전이 된 듯 머릿속을 어둡게 만들어 놓는다. 

비디오테이프는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케이스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문득, 두 딸이 어렸을 때 가족 모두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 후 TV화면을 통하여 영화를 지켜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같이 웃고, 긴장하고, 안타까워하고, 통쾌해하던 표정까지 그려졌다. 

두 딸은 영화를 보며 실제 상항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듯이 TV 화면을 향해 안돼, 안돼!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오케이, 오케이, 잘했어! 머리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까르르 웃기도 했다. 

TV 화면에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우리는 주전부리인 과자를 봉지에서 꺼내려 손만 뻗어 더듬다가 다른 사람 손과 충돌하곤 했는데 그런 것 마저도 재밌어 웃곤 했다.

 

8 - 90년대에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들이 지금의 편의점만큼이나 흔히 볼 수 있었다. 

주로 자영업 형태로 운영되었지만, 나중에는 영화마을, 으뜸과 버금, 비디오 넷 같은 프랜차이즈 대여점이 생겨나기도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상가에는 대여점이 두 곳이 있었고, 정문 앞 대로변을 따라서 줄지어 늘어선 건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많은 대여점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단돈 몇 백 원에서 몇천 원에 좋아하는 영화를 즐길 수 있으니 인기일 수밖에 없었다.  

 

주말이나 공휴일, 특별한 날에는 두 딸의 손을 잡고 비디오 대여점을 찾곤 했다. 보물 찾기라도 하듯이 꼼꼼히 훑어보며 테이프를 골랐지만 최종적으로는 낙점되는 것은 대부분 작은딸이 고른 것이었다. 월트디즈니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있었지만 이기공룡, 둘리, 영심이, 머털도사 같은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것도 있었다.

 

두 딸은 같은 영화 테이프를 여러 차례 보고서도 허기가 가시지 않은 사람이 물을 찾듯 요구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인파로 북적이는 종로나 청계천 명동에 위치한 전문적인 비디오테이프 판매 가게에 가족 나들이 삼아 들러서 구매하기도 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전후하여 뉴욕과 런던에 체류할 때도 가족이 함께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는 것은 당연히 치러야 할 의식처럼 계속되었다.

그곳에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대형 비디오테이프 체인점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뉴욕이나 런던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도보로 5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블록버스터는 매장이 세련되고 섹션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으며 은은하게 꽃 향기를 퍼지게 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매장 안에는 음료나 간단한 스낵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두 딸과 나는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듯이 머무르며 곳곳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가 보여주는 영화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두 딸은 성장함에 따라 애니메이션만 고집하지 않고 영화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포레스트 검프, 더 록, 굿 윌 헌팅, 매트릭스, 해리포터(1.2.3.4편), 반지의 제왕(1.2.3)등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보았던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다. 

 

뉴욕이나 런던의 한인 사회에서도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은 인기 장소였다. 이곳에는 한국의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들을 녹화한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의 테이프가 수두룩했다. 

저작권이나 저작물 배포권을 무시한 테이프들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국내 콘텐츠를 해외에 수출하는 판로가 없었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일부 교민들은 주말이면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하는 드라마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들을 한 보따리 빌려다 놓고 시청하기도 했다. 외국 생활의 고단함, 그리고 고국에의 향수를 지우고, 한 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내려놓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주위에 사는 교민들과 대화에는 이영애 주연의 대장금, 이병헌, 송혜교가 등장하는 올인 등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요즘은 비디오테이프를 볼 수가 없다. 그 많던 대여점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OTT(over-the-Top Media Service) 인터넷 서비스를 통하여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다양한 정보의 프로그램까지 쉽게 접할 수 있다. 리모컨 하나로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디즈니+, 아마존 프라임, 구글 플레이 등을 넘나들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명한 화질로 즐길 수 있다.

 

솔직히 아날로그시대에 사용했던 비디오테이프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장시간 재생했기 때문에 화질이 좋지 않은 데다 테이프가 늘어나기도 하고 재생 중에 잘못 감겨서 뒤엉키기도 했다. 

테이프 대여 기간은 보통 3일이었지만, 신작은 그다음 날 반납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연체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영업시간이 끝난 늦은 시간에 대여점을 찾아 테이프 전용 투입구에 집어넣기도 했다.

 

가만히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 불편하기만 했던 아날로그 시대에 삶의 행복지수 높았다. 비디오테이프 하나로도 온 가족이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모든 것이 편리함 속에서 살면서도 좀처럼 행복하지 않다.

마음속에 대책 없이 자라는 욕구와 욕심 때문이겠지만, 행복에 대한 기대치가 턱없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행복 불감증 환자(?)로 만들어 왼만해서는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며 자신을 불행한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사는 것 같다.

 

꽃이 피었다가 시들어 사라지듯이 우리와 함께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비디오테이프와 대여점도 마찬가지다. 꽃은 기다리면 머지않아 환생하듯이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찾아 오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들은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추억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나에겐 비디오테이프와 대여점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편지에 관한 추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