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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Dec 14. 2022

음악다방의 추억


음악다방, 지금은 단어조차도 생소한 그곳이 내 젊은 시절에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내 젊음의 장을 펼쳤던 70년대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모두 다 가난했고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때에서 지금처럼 야외활동, 스포츠나 취미활동을 할 시설들이 전무한 상태였다. 어쩌다 산에 가거나 여름에 해수욕장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집에 있어도 TV를 보거나 독서뿐이어서 뒹굴뒹굴하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음악다방은 마땅히 갈 곳이 없고 호주머니가 얄팍한 대학생들과 젊은 직장인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그 당시에는 비싼 오디오는 전부 수입품으로 사업에 성공한 잘 나가는 사장님 댁이나 있을 부의 상징인 물건이었다.  중산층 가정에는 소수이긴 해도 국내산 전축이 있었지만 음반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 음악을 들으려면 자연스레 음악다방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들이 모여 함께 음악을 공유하고 즐긴다는 자체가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한 잔에 몇 백 원인 커피나 음료수를 시켜 놓고 온종일 죽치고 있어도 되니 이런 파라다이스 같은 쉼터가 어디 또 있겠는가. 음악다방은 50 년대말에 서울 중심가에서 등장하여 외곽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70년대엔 대학가, 시장, 공장지역, 주택가까지 파고들었다. 마담이 나이 든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반 다방과 거의 맞먹는 수가 아니었을까(?) 


맥빠진 사람처럼 일상을 무기력하게 지내다 음악다방에 들어서면 생기가 돌았다. 성능 좋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고막을 찢을 듯한 음악, 노래와 가수에 대해서 설명하고 신청 곡과 신청자의 사연을 읽어주는 DJ의 싱싱한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멘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앉은 채로 리듬을 타는 실내를 가득 메운 젊음이 뿜어내는 열기는 용광로만큼이나 뜨거웠다. DJ는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양념처럼 간간이 들려줬지만 거위 다 외국 팝송이었다. Harry Nilsson의 Without You, Eagles의 Hotel California, Rod Stewart의 Sailing, Tony Orlando & Dawn의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 곡은 단골 메뉴였다.

나는 귀가 아플 정도의 큰 반주와 노랫소리가 좋았다. 제목도 모르는 곡이 있었고 노래의 가사는 어쩌다 쉬운 단어들이 귀에 들어오는 게 전부였지만, 내 삶의 둘레엔 모든 것들이 숨죽인 듯 조용한데 오직 음악만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나도 덩달아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음악다방의 DJ는 지금의 아이돌 이상의 인기였다. 뮤직박스 안에서 흘러내리는 장발을 한 손으로 수시로 쓸어 넘기며, 서가에 꽂혀 있는 책처럼 많은 음반 중에 한 장을 실수 없이 단번에 꺼내어 곡에 대한 풍부한 해설과 함께 음악을 틀어주는 그들은 그야말로 멋으로 철철 흘러넘쳤다. 뮤직박스 안에 가득 흘러넘치는 은은한 조명이 멋을 극대화했다. 그들은 마치 영화배우나 탤런트, 무대서 공연을 하는 가수 같았다. 젊은 여성들은 그런 DJ에게서 넋 나간 사람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음악다방 사장님들은 경쟁적으로 인물 좋고 세련되고 멘트 좋으며 음악에 조예 깊은 DJ를 영입했다.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했기 때문이다. 어느 음악다방에 인기 있는 DJ가 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열렬한 여성 팬들은 거리 상관없이 몰려들었다. 그때 DJ는 젊은이들이 우상이었고 꿈의 직업이기도 했다. 


음악다방에 갈 때는 의례 몇 명의 친구들과 동행했다. 함께 어울려 대화를 나누고 음악을 들을 때 더욱 신바람 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뮤직박스가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럴 만한 꿍꿍이속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신청 곡들이 들어오는지 DJ 옆에는 메모지가 수두룩했다. 여러 곡을 신청해도 한 곡 내지는 두 곡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수시로 DJ와 눈도장을 찍으면 한두 곡을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신청 곡을 적을 때는 중복되지 않게 신경 썼으며, 제목의 스펠링이 미스가 나올까 봐 서로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한꺼번에 신청 곡을 DJ에게 건네지 않고 시간을 두고 한 장식 건넸다.

친구들과 나는 시내 중심에 위치한 잘 나가는 음악다방을 순례하듯 다녔지만, 내가 다닌 대학교 교문 앞에 있는 곳도 곧잘 이용했다. 휴강이 되어 쉬는 시간이 몇 시간 이어진다거나, 컨디션이 안 좋아 시내에 가기 귀찮은 날이었다. 학교 앞에 여러 개의 음악다방이 있었는데 점심시간이나 강의가 끝나는 시간이면 자리 잡고 앉기가 힘들 정도였다. 

친구들과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날아가 버렸는지 영업시간이 끝나는 게 흔한 일이었다. 그때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 

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쉬웁지만 웃으면서 헤어져요.

다음에 또 만날 날을 약속하면서 이제 그만 헤어져요

딕 패밀리(Dick Family)의 또 만나요라는 노래였는데 영업시간이 끝났으니 서둘러 나가라는 신호였다.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뜨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음악다방은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임대료가 싼 지하실이 대부분이어서 채광과 환기가 안되었다. 손님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는 항상 짙은 안개처럼 자욱했다. 그때는 담배 피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비흡연자가 별로 없었고, 대부분이 줄담배를 피워 댔다. 얼마나 공기가 탁 한지 목이 아플 정도였다. 벽에 설치된 환풍기 몇 대가 쉼 없이 돌고 돌았지만 공기를 정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를 측정했다면 아주 나쁨이 아니라 심각, 위험 수준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 군사정권이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으며 경제 상황은 심각할 정도로 어려웠다.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계엄령이 내려져 학교는 휴교령으로 몇 달 동안 교문이 굳게 닫히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절망,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암울한 터널에 갇힌 나를 구출해 위로 해주고 아름다운 추억을 입혀준 것은 바로 음악다방이었다.



이미지 (경향신문 사진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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