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어렸을 때 미제는 똥도 좋다고 했다.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들 질이 특출 나게 뛰어남을 말한 것이다. 하기야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가전제품은 전무한 상태였으며, 생활용품이나 가공식품은 다양하지도 않았고 열악한 영세 가내 수공업에서 생산해 낸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초등학교 3학년 때 외국 부품 조립하여 진공 라디오 생산 시작했고, 흑백 TV는 중학교 때 생산됨)
미군이 타고 있는 지프나 트럭을 발견하면 많은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가며 기브 미 초콜릿. 기브 미 껌. 목청껏 소리쳤다. 아니 절규에 가까웠다.
간혹 미군들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아니면 측은하다고 생각했는지 껌이나 비스킷, 초콜릿을 던져주기도 했다.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조무래기들은 똥파리처럼 뒤엉켜 난리 법석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어떻게 기부 미 검. 기브 미 초콜릿이라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영어라는 게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읽을 줄도 모르는 꼬맹이들이. 간혹 기브 미를 까먹은 아이들은 껌 줘. 초콜릿 줘하기도 했지만.
서울에 큰 규모의 동대문. 남대문 시장에 가면 노상에서 꿀꿀이죽을 파는 곳이 있었다. 돼지 사료가 아니라 사람이 먹는 음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긴 나무의자에 앉거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주위에 쪼그려 앉아 그릇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먹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자장면이나 가락국수, 칼국수 한 그릇 맘 편히 사 먹기에 벅찬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놀랍게도 이것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음식 쓰레기를 가져와 끓여서 파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고기, 햄, 치즈. 베이컨, 빵, 다양한 채소의 샐러드와 쥬스, 우유 혹은 커피를 마시다 버린 것이 뒤섞인 것이다. 물론 여기엔 식사 후 입을 닦고 버린 냅킨이나 껌, 이쑤시개, 담배꽁초까지 섞여 나오곤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 몇 명과 남대문 시장에 놀러 가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눈요기를 했다. 미국 구호물품 내지는 중고품 가게에 걸린 옷들 특히 청바지에 시선이 꽂혀 망연히 바라보곤 했다. 어서 용돈을 모아 저것을 사고 말 거야 하는 희망과 함께. 그 당시는 너 나 할 것 없이 너무 가난했던 시절이라 학생복이 외출복까지 겸용하던 때였다.
볼거리가 무진무궁한 시장 바닥을 헤매다 보면 배가 등에 붙는 것 같은 허기를 느꼈다.
그때의 간식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이 최고였지만, 그날은 한 친구가 팔을 잡고 노점상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친구가 주문한 음식을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죽같이 보이는 음식이었는데 먹을만했다. 명절이나 가족 생일 때 맛볼 수 있는 고기가 씹히고 소시지가 들어있으니 마다할 맛이 아니었다.
그 음식의 정체를 안건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곳으로 안내했던 친구가 꿀꿀이죽이라고 이실직고했다.
그 순간 나는 속이 니글거리며 뱃속에 든 모든 걸 토해내고 싶었다. 돼지나 먹는 잔밥을 먹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안 돼 안 돼 소리 지르며 그의 등짝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픈 역사의 음식을 먹어 본 것도 좋은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꿀꿀이 죽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것 같다. 6.25 한국 전쟁 때부터 팔기 시작했다는데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60년대 말이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경제 상황이 안 좋았던 70년대까지도 팔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