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한겨울에도 그리 심한 추위를 경험하지 못하지만, 내가 어려서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다니던 60년대에는 유난히 심했다. 11월 하순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12월과 1월은 어찌나 추운지 머리가 어찔어찔 해질 정도였다. 눈은 왜 그리 자주 내리는지 내리는 눈과 발목까지 빠지게 바닥에 쌓인 눈이 바람에 흩날려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얼굴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감각이 없었다. 이런 날씨는 2월 하순이 되어서야 꼬리를 내렸다.
추위가 심하게 느껴졌던 것은 부실한 옷차림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오리털 파카나 구스다운 패딩, 기능성 내복이나 기모바지 같은 방한복이 전무한 시절이었다. 겨울내의에 두터운 바지, 스웨터, 그리고 모직 반코트를 입고, 털실로 짠 모자와 벙어리장갑을 끼고 귀마개를 하였지만, 그래도 추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1월이 되면 추위가 닥치기 전에 교실마다 조개탄(조개 모양으로 가공한 석탄) 난로를 서둘러 설치했다.
지금이야 학교 교실마다 온풍기나 가스히터가 구비되어 있어 스위치만 돌리면 금방 훈훈해지지만, 그 당시의 난방시설은 오직 교실 한가운데 동그마니 놓여있는 조개탄 난로가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불을 피우는 것은 아니었다. 필기를 하려면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 녹이고, 숨을 쉴 때마다 끓는 물 주전자처럼 코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날도 난로는 무용지물이었다. 바깥 기온이 영하 2도 이하로 떨어져야 피운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던 시절 한 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1월 중순에서 하순은 널뛰기하듯 기온이 오르내려 난로를 피우다 중단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12월이 되고 본격적으로 동장군이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면 거의 거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난로를 피우는 날은 수업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분주해졌다. 당번은 조개탄 저장 창고에서 일정한 양과 장작 한 묶음을 받아 왔다. 난로 관리 담당학생은 담임선생님과 함께 난로 안에 장작이 불이 잘 붙게 정성 들여 쌓아 놓고, 신문지나 헌책을 찢어 탄 재가 쏟아지는 난로 아랫부분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성냥을 그어 종이에 불을 붙이셨다.
장작에 불이 쉽게 붙으면 다행이지만, 잘 붙지 않는 날은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와 교실을 자욱하게 만들어 눈을 따갑게 하고 기침을 유발했다. 실내를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면 밖에서 대기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들이닥쳐 몸이 덜덜 떨리고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장작에 불이 잘 붙어 활활 타오르면 그 위에 조개탄을 쏟아붓고 쇠꼬챙이로 불구멍을 내주었다
조개탄이 서서히 불붙어 타오르면 그 화력은 상상외로 높았다. 난로까지 빨갛게 불에 달구어질 정도였으니까.
난로 가까이 앉은 아이들의 콧등과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얼굴은 익은 것처럼 벌게졌다. 그럴 때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젖히고, 책상과 의자를 난로에서 되도록 거리를 두고 이동했다. 항상 앞뒤, 좌우로 반듯하게 줄 맞추어 놓여있던 책상과 의자는 들쑥날쑥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한동안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난로의 화력이 사그라지면 또다시 그 위에 조개탄을 들이붓고, 불이 붙어 따뜻해 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런 과정을 수시로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교실 안은 검은 먼지가 장난 아니게 부유했다.
하루 일과가 끝날 즈음이면 아이들의 얼굴은 마치 탄광에서 석탄을 채취하는 광부 같거나 연탄공장에서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인부 같았다. 특히 난로 주변에 앉아있는 아이들 얼굴은 땀과 먼지가 뒤엉켜 가관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채 상대방의 숯검정을 칠한 듯한 얼굴을 보며 키득거렸다.
조개탄 난로는 교실 난방을 책임질뿐 아니라 우리에게 따뜻한 도시락을 제공해 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은 오전수업으로 일과가 끝나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고학년은 토요일(그 당시는 주 6일제)을 제외하고는 매일 도시락을 지참해야 했다.
지금은 학교마다 급식시설을 갖추고 점심시간이면 모든 학생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지만, 그때는 보온 도시락조차도 없던 시절이라서 노란 양은 사각 도시락에 밥과 반찬을 싸왔다.
데우지 않으면 얼음처럼 차가운 밥과 반찬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점심시간 전인 4교시가 시작되기 전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도시락을 가져다 난로 위에 수북이 쌓아 놓았다.
난로 당번은 도시락을 골고루 데우기 위해 밑에 있는 것을 위로 올리고 위에 있던 것을 밑으로 내려놓느라 수업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분주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도시락을 먹는 맛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로 당번이 도시락을 데우는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수가 많다 보니 전혀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제공되는 주전자에 든 뜨거운 보리차 물을 도시락 뚜껑에 받아 마시면서 찬밥을 먹거나 말아서 먹었다.
조개탄 난로를 피우는 날이면 바깥과 실내의 온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유리창은 바깥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김이 서렸다.
휴식시간이면 아이들은 창가로 몰려들어 손바닥을 도장처럼 찍기도 했고, 손가락으로 사람 얼굴이나 동물 모양, 꽃문양을 그리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글씨를 쓰기도 했다. 짓궂은 아이는 얼레리꼴레리 아무개는 누구를 사랑한대요. 떡하니 이름까지 써 놓아 얌전한 여자아이를 울리기도 했다.
조개탄 난로는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중. 고등학교 때까지 장장 12년 동안이나 겨울을 책임진 유일한 난방 기구였다.
그런데 조개탄 난로에 대한 추억은 유독 초등학교 때에만 남아있을 뿐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만큼 초등학교 때는 순수하던 시절이라 하얀 도화지 같은 마음에 그때의 일이 새겨져 그대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개탄 난로, 지금은 볼 수조차 없는 물건이지만, 추운 겨울이 되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나를 잡아당겨 미소 짓게 만들고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