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야식을 즐긴다. 주로 치킨이나 피자이지만 국물이 있는 것을 먹고 싶을 때는 짬뽕이나 가락국수, 탕 종류를 선택하기도 한다.
야식은 추위가 심해 집안에 틀어박혀 생활하는 시간이 많고 밤이 긴 겨울에 더 생각이 나고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치킨이나 피자 이외에도 떡볶이, 곱창, 족 발, 햄버거, 만두, 순대, 찜 닭, 자장면을 비롯하여 생선 초밥이나 싱싱한 회까지 일상에서 가까이 마주하는 음식들은 무엇이든 야식으로 즐길 수 있다.
앱을 통하여 주문하면 대부분 30분 이내에 집 현관 앞까지 배달이 된다.
그야말로 지금은 야식의 홍수, 아니 야식의 천국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60년대에는 딱히 야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가난하던 시절이라 하루 세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흔한 세상이었으니까.
그래도 야식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한겨울 기나긴 밤에 먹었던 찹쌀떡과 메밀묵이다.
그때는 추위가 왜 그렇게도 지독했는지 집안까지도 찬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방마다 연탄불을 피우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그나마 방바닥 아랫목은 따끈했지만, 지금처럼 집을 지을 때 난방재나 단열재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이중으로 유리 창문을 만든 것도 아니어서 웃풍이 장난 아니게 심했다. 이불속에 누워있으면 등은 따습고 얼굴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바람은 왜 그리도 심하게 불어 대는지 유리창문은 짓궂은 아이가 흔들어 대듯이 덜컹거렸고, 밤새 지치지도 않고 골목길을 휘젓고 다녔으며, 전깃줄을 인전사정 볼 것 없이 괴롭혀 귀신처럼 음산한 소리를 내며 울게 만들었다.
해가 짧아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으스스한 한기가 몸에 달라붙어 일찌감치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누웠다 엎드리기를 반복하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 혹은 음악에 귀 기울이거나, 만화책이나 소설책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어김없이 골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차압 싸 알 떠어억~, 메이미일 무 욱~
찹쌀떡과 메밀묵 장수의 목청을 한껏 높여 길게 빼는 소리가 거친 바람을 뚫고 날아들었다.
어머니는 찹쌀떡을 종종 사시곤 하셨다. 가끔은 메밀묵까지 사서 맛있게 양념을 무쳐 안방에 둥근상을 편 후 차려 놓으시고 가족이 둘러앉아 야식을 즐기기도 했다. 쫄깃한 겉과 속에 들어 있는 달달한 팥고물을 함께 베어 물어 씹는 찹쌀떡 맛이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황홀한 것이었다. 입 주위에 하얗게 전분을 묻히며 욕심 사납게 허겁지겁 먹다 보면 목이 메이기도 했다.
“체하겠네. 누가 보면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오는 줄 알겠어. 천천히 먹어.”
어머니가 곱게 눈을 흘기시며 내 입주위에 뭍은 흰 가루를 휴지로 닦아 주신 후에는 메밀묵을 조그만 접시에 담아서 건네주셨다.
솔직히 나는 메밀묵은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 맛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먹으면 입안에 남아있는 달콤한 맛까지 빼앗길 것 같았다. 그래도 먹으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개운함은 있었다.
찹쌀떡과 메밀묵 장수들은 식솔이 딸려 있는 가장들도 있었지만, 나이 어린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도 있었다. 나라가 가난해서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던 암울한 시절, 옹색한 가정에서는 학비와 책, 학용품 구입 등 다양한 잡비를 전적으로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고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 같으면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거나 24시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찹쌀떡, 메밀묵 장수들은 어둠이 내려앉은 6 -7시부터 일을 시작하여, 야간 통행금지가 시작되기 전 12까지, 5 -6시간을 부지런히 골목길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강추위는 수은주를 온도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사람의 손과 발, 얼굴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눈까지 내려 빙판길이 되면 걸어 다니는 것조차 힘들었다.
거기에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하여 감각이 없는 입으로 계속 반복해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것은 보통 인내심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런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고, 처자식을 굶기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굳센 다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철이 들고 나서야 어머니가 찹쌀떡과 메밀묵을 종종 사셨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겨울의 기나긴 밤, 출출해하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추위에 고생하는 고학생들과 가난한 가장들을 한 푼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셨던 것 같다.
“세상에 나이도 어리고 입은 것도 허술한데 이 추운 날씨에...... 쯧쯧쯧”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고,
“에그 애들이 줄줄이 딸려 있을 가장이 이것 팔아서 식량 살 돈이나 벌 수 있으려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으시기도 하셨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찹쌀떡과 메밀묵 장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2년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찹쌀떡과 메밀묵 장수들은 자정을 넘긴 새벽까지도 거리를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양 음식인 프라이드치킨과 피자, 햄버거가 들어와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맛의 신세계에 빠져들었고 자연스럽게 찹쌀떡과 메밀묵은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90년대 초에는 밤에 음식을 배달하는 야식 업체들이 생겨났고, 배달 메뉴도 다양하게 되었다.
온갖 먹을거리들을 늦은 밤은 물론 새벽까지 배달해 주는 세상은 찹쌀떡과 메밀묵 장수들을 완전히 밀쳐내 버리고 추억 속에만 남게 만들었다.
2010년부터는 배달 앱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야식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밤이 되어도 대낮처럼 밝고 북적거리며 시끄러운 이 도시 속에서, 야식거리가 주체할 수 없는 이 풍요로움 속에서, 지난날 고요했던 겨울밤의 정적을 깨는 찹쌀떡 메밀묵 장수의 애절한 목소리와, 그것을 사서 먹던 추억의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