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80년대 유신정권과 뒤를 이어 들어선 신군부 정권으로 황무지 같은 길을 걸을 때, 나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고 삶을 메마르지 않게 해 준 것은 음악과 영화였다. 영화 감상은 단지 오락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전면적으로 시행되기 전 까지는 특별한 조건을 갖추지 않는 한 지금 우주여행 가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종횡무진 세계를 맘껏 누빌 수 있었다. 이태리 로마의 역사적인 건축물들, 안개에 젖은 낭만적인 프랑스 파리의 거리와 센 강, 오스트리아의 대저택과 수녀원, 알프스 전경, 아프리카의 밀림과 야생 동물들, 지중해의 쪽빛 바다와 요트,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미라, 그리스의 신전, 광활한 모래사막, 장막 속에 가리어졌던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과 요새 같은 지하철 역, 미국 뉴욕의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 센츄럴 파크, 그리고 일본 전통 가옥과 후지산도 영화 속에서는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서울이나 지방이나 판박이처럼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물갈이되었지만 2000년을 몇 년 앞둔 90년대 말 이전에는 한결같이 단관 극장이었다. 수 없이 많은 극장들은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서울의 경우 중심지역인 종로, 을지로, 청계천, 퇴계로에 있는 극장들은 대부분 개봉관으로 일류라고 했다. 개봉관에서 종영된 영화를 빠른 시일 내에 보여주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반듯한 영화관을 2류라고 했고, 3류는 오래된 영화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단관 극장은 독립 건물(소수는 상가건물에 있었음)에 각기 외관을 달리하고 있었다. 직접 손으로 그린 대형 영화 간판이 전면을 가득 채우며 걸려있었고, 매표소 앞에는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이었다. 인기 있는 영화가 상영될 때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보통 하루에 6회를 상영하는데 오전에 표가 매진이 되기도 했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극장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이런 때면 영락없이 암표상들이 등장하여 웃돈을 받고 표를 팔기도 했다.
극장 앞에 노점상에는 고소한 땅콩이 수북이 쌓여 있고 불이 뜨거워서 몸을 비비 꼬는 오징어가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손님들을 모았다.
지금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한 개 객석은 2 – 300석이지만, 단관 극장의 규모는 비교가 안될 만큼 컸다. 보통 2층이지만 3층인 곳도 있었으며 개봉관일 경우에는 1200석에서 2천여 석 규모였다. 세칭 2류 3류 극장도 1000석에서 4 - 500석은 갖추고 있었다.
대한 극장과 스카라 극장은 70mm 영사기와 초대형 스크린을 구비한 대표적인 곳이었다.
내가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 고등학생 때이다. 그 당시에는 한 학기에 1 – 2 회 단체영화 관람이 있었다. 따분한 학교생활과 과외공부, 그 외의 시간은 TV에 시선을 주고 있거나 만화와 소설을 뒤적거리던 일상에서 영화를 보는 날은 멋진 장소로 여행을 떠나는 것만큼 흥분되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있는 단체영화 관람으로는 성에 찰리가 없었다. 학교에 행사에 있어 단축수업을 하거나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은 발길이 자연스럽게 극장으로 향했다. 개봉관은 입장료가 비싸기 때문에 재개봉관을 찾기도 했고, 싼 값에 영화를 두 편씩 감상할 수 있는 세칭 삼류 극장에서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영화관을 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생활지도교사들에게 적발이 되면 정학처분이 내려졌다. 그래도 영화의 유혹을 뿌리칠 재간이 없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게 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와 재개봉관에서 신나는 서부극을 보고 나오는데, 극장 출입문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교외생활 지도를 하기 위해 나온 수학 선생님이었다. 그는 이미 우리를 발견하고 손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제는 정학이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는 수첩에다 반과 이름을 적고 그다음 날 학교에 등교하는 대로 생활지도실로 오라고 했다. 걱정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설쳤다. 정학을 받으면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쫓기는 자가 절벽 앞에 선 것처럼 난감하기만 했다.
그 이튿날 등교하자마자 생활지도실로 갔다. 친구와 나는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평소 풀밭 위에 양 같은 온순한 생활이 참작되어 반성문 한 장으로 해프닝은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야만적인 교칙이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세계를 간접적이라도 체험할 수 있고, 교훈적이며 정서적으로 도움을 주는 영화라면 오히려 관람을 장려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70년대 대학생활의 시작은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맘껏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허가증을 받은 것 같았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나서 하루에 두세 군데 극장을 옮겨 다니며 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재개봉 관이나 오래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았지만, 대학생활을 하면서 달라진 것은 개봉관에서만 본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봉하는 영화를 족족 다 보았기 때문에 다른 극장에서는 볼 것이 없었다.
얼마나 영화에 빠져 살았는지 아침에 기상하면 조간신문을 펼치고 영화 광고부터 확인했고, 관심을 끄는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는 날은 마음이 설렜다. 극장을 찾았는데 표가 매진되어 보지 못하게 되면 영화의 내용이 궁금하여 밤에 잠이 오질 않을 정도였다.
광화문에 국제극장, 퇴계로에 대한극장, 종로 3가에 피카디리와 단성사, 서울극장, 종로 2가에 허리우드, 청계천에 아세아, 명동에 중앙극장, 충무로에 스카라 극장, 을지로에 파라마운트, 명보극장과 국도극장은 얼마나 자주 다녔는지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1998년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CGV강변 11이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열었다. 그 후에는 롯데, 메가박스 같은 체인형 복합영화관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이러한 변화는 단관 극장들을 급속히 쇠퇴의 길로 몰아넣었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개봉관들은 재개발로 흔적 없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거나, 몇 곳은 복합 영화관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한 빌딩에서 옛날 단관 극장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복합영화관은 보통 열개 내외의 스크린을 가지고 있지만, 17개나 되는 곳도 있다. 최상의 음향과 영상을 갖추고 있고 실내도 쾌적하다. 휴게실이며 매점 등 편의시설도 잘 되어있다.
티켓은 키오스크에서 쉽게 구입하고, 24시간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하다. 좌석도 본인이 선택한다. 하지만 이 쾌적함과 편리함은 우리의 추억과 낭만을 앗아가 버렸다.
가끔 시내에 나가게 되면 7 - 80년대 누비고 다니던 영화관들이 있던 곳을 순례하듯 둘러본다. 단관 극장들은 높은 빌딩들에 자리를 양보한 채 흔적을 꼭꼭 숨기고 있다.
어려운 시절 나를 위로해 주고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주었으며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영화를 보여주던 단관 극장들.
나는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그리움으로 되돌아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