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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Nov 23. 2022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여인의 슬픈 초상화





Amedeo Modigliani,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oil on canvas, 53x 37.5cm, 1918, 개인 소장 






유럽의 미술관을 관람할 때면 단체로 온 어린 학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전시된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모사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복잡한 형체와 구도, 다양한 색채의 그림들은 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흉내내기가 힘든데, 하물며  어린 학생들이 스케치북에 담아내느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전시실에 모딜리아니의 인물화가 있다면 아이들은 보너스를 받은 것 같은 기분에 환호할 것 같다.

모딜리아니의 인물화처럼 모사하기 쉬운 작품은 세상에 또 없을 테니까. 얼굴을 갸우뚱하고 길게 그린 후 목을 기린처럼 길게 그리기만 해도 얼추 그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예술혼까지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나 유럽에 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다양한 아프리카 미술품을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 원시인들의 조각, 특히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 과장되게 얼굴과 목을 길게 만들고 눈, 코, 입도 단순화시켜 마치 현대 추상작품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서 서구의 많은 작가들이 아프리카 조각에 예술적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케 브랑리 미술관에는 아프리카 원시 조각상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많은 화가들은 규모가 루브르 보다 작아 동선이 짧은 케 브랑리 미술관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작품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아프리카 조각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자신의 작품에 반영시킨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모딜리아니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각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작업에도 임했기 때문에 조각에서 얻은 영감을 회화에 접목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과 비슷한 것을 케 브랑리 미술관에 소장 중인 아프리카 원시 조각 작품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Amedeo Modigliani, 누워있는 나부, oil on canvas, 





1884년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잔병을 달고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허약해 중학교 생활조차 할 수 없는 아들을 자퇴시키고 미술학원에 보내어 그림을 배우게 한다. 그런데도 건강이 악화되자 그를 데리고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미술품들이 많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여행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모딜리아니는 예술적 안목을 갖추게 되고, 화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의 많은 화가들이 예술가들의 낙원인 파리로 몰려들었다. 몽마르트르를 기점으로 파리파’라고 불리는 외국인 예술가 집단이 결성되었다. 20대 초에 파리로 거처를 옮긴 유대계 이탈리아인 모딜리아니도 파리파에 참여한다. 

모딜리아니는 어느 화가 보다도 열정적으로 작품에 몰두했지만그에 대한 평가는 혹평 일색이었다누구 한 명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헐값에 그림을 팔아야만 했다. 

막막한 현실을 잊으려 술과 마약에 빠지고수많은 여인들과 방탕한 생활을 한다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보헤미안 같은 생활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미술계에서 역대 최고의 미남이란 수식어가 따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인물이 출중했는지 알 수 있다여자들에게 인기가 하늘을 찔렀을게다. 더구나 아담한 체구의 그에게 여자들은 모성애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의 그림은 대부분 초상화나 누드화였는데, 이 시기 술집에서 만난 여인들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모델들의 삶과 인생의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술집을 전전하던 모딜리아니는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화가 지망생인 잔 에뷔테른이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딜리아니보다 한참 어린 데다(18세)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두 사람의 불꽃같은 사랑은 동거생활로 이어지고 딸을 낳는다.

모딜리아니는 잔을 모델로 열정적 작품 활동을 다. 3년 동안 26점이나 되는 많은 초상화를 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것은 그에게 가슴 설레고 마음 따뜻해지는 일이었을 게다. 좀처럼 인물에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던 그가 잔의 초상화에는 대부분 눈동자를 선명하게 그린 것만 보아도 잔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고, 영혼까지 알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게다.

 




Amedeo Modigliani, 잔 에뷔테른의 초상, oil on canvas, 1918





지독한 가난은 계속되었다목에 풀칠하기 조차 힘든 절망적인 생활이었다잔의 부모는 보다 못해 둘째애를 임신한 딸을 강제로 그들의 집으로 데려간다

늑막염, 폐결핵, 폐렴 등으로 고통받던 모딜리아니는 집에서 혼자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늦게서야 발견하고 병원에 실려가지만 회생하지 못하고 36세라는 한창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모딜리아니가 사망한 이틀 후, 잔은 부모의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임신 8개월 된 둘째를 몸속에 간직한 채.


세상은 너무나 비정한 것 같다그가 사망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작품이 비싼 값으로 팔리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계속 갱신되었다.

2015.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그의 작품 누워있는 나부가 1억 7,040만 달러(1972억 원)에 팔려 그 당시 기준으로 역대 두 번째로 비싼 미술작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참조: 글 중간에 있는 파란 쿠션이 있는 나부) 2018년에는 역시 크리스티 경매에서 또 다른 누워있는 나부가 1억 5720만 달러(1840억 원)에 낙찰되어 당시 기준으로 4번째 높은 가격을 기록하였다.(참조: 글 아래에 있는 나부)

그는 살아생전에 개인전은 단 한 번 밖에 하질 못했다.

1910년대 후반, 친구의 도움으로 파리의 한 화랑에서 처음 개인전을 열지만그의 누드화를 본 경찰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작품을 철거할 것을 요청했고아무런 성과 없이 작품을 내린다.

살아생전을 그의 예술성을 인정해 주고 지원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그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황망히 세상을 떠나질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 잔 또한 임신한 몸으로 그의 뒤를 따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Amedeo Modigliani, 누워있는 나부, oil on canvas,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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