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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Dec 07. 2022

장 미셀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

그라피티로 전설이 되다.






Jean Michel Basquia, Warrior, 1982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자성 예언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그것은 간절한 사람에게 기적 같은 선물을 안겨 주기도 한다.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박상영 선수를 기억할 것이다그는 결승전에서 헝가리 선수인 기자 임레에게 10대 14로 뒤진 상태에다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패색이 짙었다그는 포기하지 않고 휴식시간이면 나는 할 수 있다나는 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자성 예언을 불어넣었다그의 간절함은 끝내 기적을 가져왔다. 15대 14로 역전승하여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장 미셀 바스키아는 청소년 시절 줄곧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나는 전설이다.

나는 열일곱 살 때부터 늘 스타가 되기를 꿈꿨다찰리 파커(Charlie Parker : 미국의 재즈색소폰 연주자로 비밥계의 거장),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 : 음악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렉트릭 기타 리스트 중 한 명), 같은 우상들을 떠올리며 이들이 스타가 된 과정을 꿈꿨다

꿈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젊은 나이에 믿어지지 않는 기적을 거머쥔다찰리 파커나 지미 핸드릭스처럼 음악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 미술계에서 정상에 우뚝 섰다팝아트의 거장이라고 하는 앤디 워홀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작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Jean Michel Basquia, Cabeza, 1982




위대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

바스키아도 훌륭한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면 미술계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고사성어에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다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한 가르침이란 뜻이다즉 교육은 주위 환경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푸에르토리코 계 미국인인 어머니는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어린 바스키아를 데리고 뉴욕의 많은 미술관들을 수시로 다녔다그런 까닭에 중세미술르네상스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가까이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아이티인 아버지가 회계사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어 이런 문화생활이 가능했다

바스키아는 어머니와 함께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을 보면,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그를 미술의 길로 들어서게 한 안내자였다. 

바스키아가 7세인 1968년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장기 입원하게 되었을 때어머니는 그에게 해부학에 관한 책을 선물했다. 평소 해부학적인 관점에서 표현한 화가들의 그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인체의 뼈와 해골내장의 여러 기관들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이미지 표현은 그런 연유에서 기인된다.

 

장 미셀 바키아는 흑인으로서 천재적 재능을 지닌 그라피티 작가이다그를 가리켜 80년대의 제임스 딘, 혹은 검은 피카소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인기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성공을 안겨준 그라피티(Graffiti)란 무엇인가?

유럽이나 미국을 여행할 때 건물의 벽이나 담장운동시설이 있는 곳, 기차역, 전동차버스 등에 그려진 낙서화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을 그라피티라고 한다주로 스프레이로 그려지기 때문에 스프레이(Spray) 아트에어로졸(Aerosol) 아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1960년대 뉴욕에서는 반항적인 10대와 흑인소수민족들이 자신들의 인권 주장과 불만을 강렬하면서도 즉흥적으로  문자와 그림으로 도시 곳곳을 누비며 그라피티를 그렸다.

장 미셀 바스키아는영재들을 위한 시티 애즈 스쿨(City as School)에서 만난 알 디아스(Al Diaz)와 SAMO(Same Old Shit: 흔한 낡은 것들)라는 가상 인물을 만들고, 뉴욕 곳곳을 자기 집처럼 헤집고 다니며 스프레이로 권위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그라피티를 그린다. 특히 그들이 자주 찾은 활동무대는 소호였다그 당시 소호는 갤러리 밀집지역인 데다 1960년 이전까지 공장과 창고 지역이어서 허름한 건물들이 많아 그들이 작업(?)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Jean Michel Basquia, self-portrait as a heel, part two,1982, 243.8x150cm




1978년 고등학교 졸업을 1년 앞두고 바스키아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와 혼자 생활한다. 중산층 가정에서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생활하던 그는 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물건을 파는 등 사서 고생을 한다.

우편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길거리 미술을 병행해 캔버스, 혹은 종이에 작업을 열중한다.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그의 그림은 스프레이뿐만 아니라 유화물감이나 아크릴 칼라, 크레용과 파스텔 등 재료의 폭을 넓혀 사용했다. 종교와 정치, 부와 빈곤, 민족주의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그림에 담았다.

바스키아는 1982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한낱 그라피티나 하던 신분에서 신인 아티스트로 변신한 것이다. 

개인전을 계기로 팝 아트계의 거장인 앤디 워홀을 만나고, 1985년에는 함께 전시를 열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그 후로도 앤디 워홀과 공동 작업을 하면서 서로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라피티가 예술이냐 아니냐를 두고 오랫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불법으로 공공장소에 몰래 숨어 낙서한 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문화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게다가 유아적이고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정적이었다. 긍정적인 측면은 그라피티를 통하여 사람들이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과, 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며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새로운 창조라는 점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라피티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어졌다. 현대미술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이제는 화가들에게 큰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집 벽이나 담장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장 미셀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8년 8월 맨해튼의 작업실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바스키아가 작품 활동을 한 기간은 8년 남짓이다. 그 기간 동안 3000여 점이라는 엄청난 작품을 남길 정도로 그는 예술혼을 불살랐다.

2017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982년작 무제 (Untitled)가 1억 1050달러(당시 약 1248억 원)에 낙찰되며 앤디 워홀을 넘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미술가가 되었다

1981년 이탈리아 개인전을 위해 그린 다른 길 옆의 들판(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이라는 작품이 있다거대한 화면에 뼈가 다 드러난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현재 예상 가격이 2000억 원을 호가한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나는 전설이다.

나는 열일곱 살 때부터 늘 스타가 되기를 꿈꿨다.

그의 자성 예언처럼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영원한 스타가 되었다. 그의 작품과 이름은 영원토록 반짝일 것이다.




Jean Michel Basquia,  Self - Portrait, 아크릴. 크레용, 193x239cm, 1982,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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