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와 나

차 앞에서 마주한 존재

by 무작위자기

역할들의 홍수 속에서 사라지는 ‘나’

차를 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한 사람의 차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우리는 수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사회인으로서의 나’, ‘가족구성원으로서의 나’, ‘친구로서의 나'등
여러 관계들을 유지하는 데 몰입하다 보면
정작 '나로서의 나’를 위한 순간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찻물 속에 비치는 온전한 존재

행다를 할 때면 차와 물 그리고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완성된 찻물의 수색(水色)에는
어떠한 역할도, 관계도 덧씌워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가 고요히 비친다.


차를 내는 행위는 어쩌면
삶의 여러 층을 걷어낸 채 스스로와 다시 만나는 작은 의례에 가깝다.


차로서 스스로를 마주함에


과잉의 시대, 길 잃은 마음들

현대의 관계는 얽히고설켜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물질과 감정, 정보가 과잉으로 넘쳐나는 시대에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난제와 같다.


넘치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조차 붙잡지 못한다.


차가 건네는 하나의 길

이러한 문제에 대한 소박한 해결책으로
차와 행다(行茶)를 제안한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스멀히 피어난 향을 맡으며
그저 담담한 수면을 바라보자니
있는 그대로의 심상(心狀)에 한 발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이것이 단순한 착각인지,
혹은 참된 무언가의 단서인지
함께 확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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