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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마 Dec 09. 2024

혈육도 모르는 비밀

트라우마의 역사

"학생! 어디까지 가? 추운데, 태워다 줄게~타"


범죄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대사를 하는 고급 세단의 차 한 대가 내 눈앞에서 멈춰 던 건

내 나이 18살,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시골에서 제시간에 버스를 타기란 쉬운 일은 아니어서 종종 동네 사람들이 운전하며 가다가

누구든 태워주기도 태워 오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청주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을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은 5분이 훌쩍 지났기에, 5분만 더 기다리다 집으로 다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고급세단의 검은 차가 내 앞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보조석 창문이 쓱 내려가더니 얼굴에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50대 남성은 세상 착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왔다.

 내키진 않았지만 곧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고민을 하며 차 안을 빠르게 스캔했다.

뒷좌석에는 부내 나는 고급차의 상징 같은 양복재킷이 정갈하게 걸려있었다.


"얼른 타~춥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절하는 게 힘든 나는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디까지 가니?"

"터미널까지만 데려다주시면 돼요."라고 말을 하는데 갑자기 다리가 덜덜 떨렸다. 느낌이 쎄 했다.


번화가에 들어서자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 농협에 볼 일이 있어요."


내 말에 남자의 대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너 도망가면 죽을 수도 있어, 알지?"

밑도 끝도 없는 협박을 했다.


차에서 내린 후, 농협으로 뛰어갔다. 당신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볼일이 있던 것처럼.


할수 없이 농협 ATM 기계 앞에서 뭔가 하는 시늉을 했다. 장날이라 사람이 바글바글 했는데 도와달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죽이러 올까 봐 겁이 나 돌아볼 수도,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볼 수도 없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10분을 발만 동동 구르다 도살장 끌려가듯 차에 탔다. 바보같이.


"사실대로 말해. 너 어디까지 가는데?"


말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댔어'

속으로 그 말을 곱씹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안성에 가요. 안성에 제 동생이 있어요. 동생을 만나러 가야 해요."

"동생은 왜? "


왜 인지 그때. 세상 불쌍한 척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갔으며, 나는 그런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어머니에게로 갔지만

동생은 아직 아버지랑 같이 살고 있고, 아버지 모르게 동생을 보러 가야 한다는 그런..

생판 모르는 남에게 가정사를 있는 그대로 말하되, 조금 더 가여움을 느끼도록 눈물을 훔치는 명연기를 시전했다.

 

남자는 내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게 먹힐 수도 있겠다는 이유 모를 확신 같은 게 어렴풋이 들었다.


남자는 안성을 향해 가는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 어느 얕은 야산 중턱으로 차를 끌고 올라갔다.

어느 정도 오르니 평지가 보였고, 바로 옆은 낭떠러지였다.


"나 오줌 싸고 올 테니까 신고하거나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알겠어? 내가 여기서 널 성폭행 해도 아무도 몰라~여기 산이잖아. 그리고 옆에 낭떠러지라 밀어버리면 그만이야."

남자는 벨트를 풀며 차에서 내렸다.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 눈물조차 안 나왔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저 사람은 날 죽일 작정인지, 어디로 팔려가는 건 아닌지 분간이 서질 않았다.

용기를 내어 사이드 미러를 힐끔 쳐다봤다. 남자가 보이질 않았다.


얼마쯤 흘렀을까.

남자는 차에 탔고, 다행히 아무일 없이 핸들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나도 너 만한 아들이 있어".

 어쩌고저쩌고 본인 가정사를 얘기했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이 차는 안성으로 향하고 있고, 사람은 나에게 회유당했구나. 연기가 먹혔구나 싶었다.

 

 오전에 시작된 격랑의 드라이브는 노을이 붉게 묽들 무렵, 안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남자는 나에게 명함을 한 장 꺼내어 주본인이 동네 근처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니 힘든 일이 있으면 전화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현금 이만 원을 꺼내 선심쓰듯 이 돈으로 동생이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쥐어주었다.


 나는 납작 엎드려 절 할 기세로 꾸벅 인사를 하며 차에서 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미널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예매하고 대기 하는 사이  제 정신이 돌아왔고, 축축하게 젖은 명함과 현금 이만원을 보고있자니 그 남자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구석진 터미널 화장실 맨 끝 칸에 들어가 잘 찢기지도 않는 그것들을 찢고 또 찢어 변기에 버렸다.

 



그 후 나는 수 일 동안, 동네 버스정류장은 물론 집 밖을 나갈 수 없었으며, 밀폐된 좁은 공간에 가거나 모르는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기피다.당연히 학원도 한 동안 가지 했다.

  자꾸 땡땡이 친다며 꾸중을 들었지만  그당시 엄마와 새아빠의 관계가 좋지 못했기에 얘기조차 꺼낼수없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 해피엔딩으로 종결되어지는 듯 하지만,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아서는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뻗쳤다. 나를 몇 시간 동안 공포에 떨게 했던 남자도,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학대를 했던 아버지도, 성별이 모두 남자였기에 남자인 어른을 두려워했으며, 사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흔한 영화관 데이트도 못하는 현실을 마주 할 때면 아직까지 어느정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결과를 낳았으니 새드엔딩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트라우마를 극복해 내려고 참 무던히 애를 썼다.

일절 일면식 없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으며, 심지어 사업을 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먹고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진 호랑이는 나였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주 보고 피 튀기며 싸우는 방법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비록 잔흔은 남겠지만, 그것이 훗날 영광의 상처로 남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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