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남의 소개서?
타닥.. 탁… 타다닥... 조용한 방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신경질적인 탁! 소리 뒤에는 옅지만 깊은 한숨소리도 들린다.
“ ‘周’ 두루 주, ‘瑩’ 밝을 영 “ 주위를 밝게 빛내는 신주영이라고 합니다.
자소서의 첫 줄은 항상 진부하다.
하지만 이 문장 이외에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을 만큼 나는 게으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뒤의 내용 또한 항상 똑같았다.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쓸 때마다 느끼지만 평범이라는 단어에서는 항상 깊은 고민에 빠진다.
‘평범’이라는 것이 가족 구성원과의 화목함을 말하는 것이라면 나의 평범은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
알코올과 도박 중독자인 아버지는 다행히 내가 아주 어릴 때 집을 나가 주셨고,
남은 엄마와 나는 친구처럼 다정한 사이기 때문에 반은 맞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평범’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중산층, 즉 경제적인 수치의 평균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아직도 2000/70짜리 월세방에 엄마와 살고 있는 나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자기소개서 첫 줄에 적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난 항상 남이 쓴 자기소개로 나를 소개하고 있다.
“그럼 이게 자기소개서야? 남의 소개서야?”
오늘도 난 평범이라는 단어 앞에서 쓸데없는 고민에 온 힘을 다 하고 있었다.
“아들 뭐 해? 밥 먹어”
엄마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반이나 되는 화목함의 지분을 갖고 있는.
식탁을 보니 오늘이 어제인지, 아니면 어제저녁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뭐야? 나 장조림 먹고 싶다니까, 반찬이 맨날 똑같네”
“그게 은근히 손이 많이 가 일단 먹어 다음에 엄마가 해줄게”
“해주는 거야 사주는 거야?”
“정성스럽게 만든 거 사서 담아줄게 요즘은 그게 더 낫더라”
엄마와의 대화는 늘 편안했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다.
햇볕 좋은 날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따분한 여유로움을 즐기고 싶지만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와 호수를 건들 것 같은 그런 불안감?
“뭐 했어? 자기소개서 썼어?”
돌멩이가 날아와버렸다.
“응”
괜찮다. 작은 돌멩이 하나쯤은 금방 가라앉아 버릴 테니까
“무슨 회사? 뭐 하는 덴데?”
엄마의 질문이 계속될수록 호수로 던져지는 돌멩이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냥 뭐 일반 사무직이지 뭐”
그리고 이어지는 적막함.. 누가 짧지만 긴 침묵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침묵이 짧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간이 잠깐 멈춰서 그런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엄마와 나의 젓가락이 반찬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내가 내밀 수 있는 증거다.
“그래 어디든 가서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하면 남들처럼 먹고사는 건 문제없어”
돌을 던진 장본인이 호수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그런 엄마를 보니 그깟 돌에 요동쳤던 호수도 미안하다.
“이번 달 생활비 엄마 계좌에 넣었어 한번 확인해 봐”
미안함에 황급히 돌린 나의 말이 이번에는 엄마에게 던진 돌이 된 것 같다.
“그냥 너 쓰지…..”
매달 생활비를 보태고 있지만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도 같다.
“같이 쓰는 건데 같이 내야지”
“엄마도 돈 버는데…”
그렇다. 엄마도 돈을 번다. 나도 돈을 번다. 풍족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집 근처 과일가게에서 반년 정도 일 했었는데, 사장님이 가게를 접는 바람에 집에서 조금 더 먼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
과일도 곧 잘 챙겨 주셨던 덕분에 엄마와 한동안은 저녁 식사 후 디저트 타임도 즐길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이 내심 아쉽다.
엄마는 건물 계단 청소를 다니신다. 차라리 편의점 같이 덜 움직이는 일을 하라고 꾸준히 말하지만, 그런 일은 답답하다며 계속 계단 청소를 고집하고 있다.
“맞다 나 내일 아르바이트 끝나고 영준이랑 저녁 먹고 들어와”
“영준이? 영준이는 요새 뭐 하고 지낸 다니?”
“똑같지, 회사 다니면서…”
“거기는 뭐 하는 회사래?”
“무슨 광고 대행사였나? 그랬던 거 같은데”
“그럼 내일은 엄마 혼자 저녁 먹어야겠네 혼자 맛있는 거 먹어야겠다”
거짓말이다. 분명히 오늘과 같거나 아니, 더 별 볼일 없게 한 끼 때우고 말 게 분명하다.
내 키가 엄마를 훌쩍 뛰어넘고 나서부터 엄마가 혼자 저녁을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항상 신경 쓰인다. 마음이 아픈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어딘가 불편한 건 확실하다.
마지막 한 술을 뜨고 엄마의 밥그릇을 쳐다보니, 엄마는 아직 한 숟갈 정도 남은 것 같다.
“다 먹었으면 먼저 들어가서 자소서 마저 써”
아직 젓가락을 안 내려놓길 잘했다.
“아직 다 안 먹었어”
엄마가 마지막 한 술을 뜨는 동안 나는 입 안에 얼마 남지 않은 밥을 아껴가며 반찬을 집어넣고 있었다.
“나 그럼 들어가서 마저 쓰고 잘게”
“그래, 좀 재밌게 한번 써 봐, 궁금해서 뽑아줄 수도 있잖아”
어이가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내세울 것도 없는데 한번 재밌게 라도 써볼까?
“오.. 나쁘지 않은데?”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고,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엄마는 바로 설거지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재밌게… 재밌게… 임팩트 있게 삼행시로 한번 시작해 봐?”
신. 신주영을 뽑아 주. 주신다면 영. 영혼까지 바쳐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너무 재미가 없어 자괴감이 들 지경이었다.
삼행시를 지워버리니 다시 자기소개가 아닌 남의 소개가 되어 버렸다.
“그냥 내자, 내 소개 누가 궁금해한다고”
“탁..”
고작 지원서 하나 제출한 하루의 마무리가 나름 큰 일을 해낸 것 같다.
이 만족감이 사라지기 전에 잠에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