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신년이 밝았다.
유럽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약 2주간 보내고,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다시 학교 수업이 시작되었다. 지난 한 해, 여름 방학 없이 1년 내내 꾸준히 학교를 다니다가 겨울의 크리스마스 연휴로 2주간 수업이 없자, 오히려 조금은 지루했다.
매일 규칙적으로 학교에 다니던 일상이 멈추고 보니,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방학’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다가왔고, 공부 외에 따로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신년 첫 주, 오랜만에 등교하자 친구들과 “Happy New Year!” 인사를 주고받았다.
몰타에 와서 낯선 문화를 접할 때마다 어색하고 쑥스럽던 인사도, 이제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작년 마지막 수업도 Kevin과 함께였는데, 새해 첫 수업 역시 그와 함께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초급반에서 가장 오래 그와 수업을 받은 학생이었고, 그의 발음과 설명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다시 케빈과 신년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우 정확한 문법 설명과 표준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하는 선생님이라, 늘 만족스럽게 수업을 듣곤 했다.
예전엔 상급반으로 올라가면서 프랑스 출신 교사 ' Amira'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그의 프랑스식 억양이 익숙지 않아 한동안 혼란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다른 반으로 옮겨야 할까?” 하는 고민도 했지만, 그런 행동이 아미라에게 실례가 될까 걱정도 되고 그녀가 나에 대해서 실망을 할 것 같아서 묵묵히 수업을 이어갔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못 알아듣는 거지’라는 생각에 그저 견디며 따라갔던 시간들이 있었다.
몰타의 랭귀지스쿨에서는 교사의 국적에 따라 발음이 조금씩 달라서 초반에는 힘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양한 국적의 선생님들과 수업을 하며 그런 점도 점차 익숙해졌다. 여러 발음을 접하고, 다양한 억양에 귀를 열다 보니 어느새 그런 경험들이 내게 하나의 내공이 되어 있었다.
새해 첫 수업. 케빈은 오랜만의 수업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말도 천천히, 수업 진행 속도도 느리게 가져갔다. 나로서는 그가 말을 천천히 해주니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했고, 수업의 흐름도 한결 편안하게 느껴졌다.
3일째 되는 날, 이번 주 수업 주제는 ‘시제(Tenses)’였다.
우리말에는 없는 개념인 현재완료와 현재완료진행형을 설명하는 케빈의 설명은 여느 때처럼 꼼꼼했다. 과거형, 과거분사, 현재완료, 현재완료진행형 사이의 관계를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그 말들이 귀에 들어왔다. 문법적인 용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설명의 흐름이 이해되었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케빈은 늘 하나의 문법 항목을 설명하는 데에도 충분한 시간을 들였다.
한 문법을 설명하는 데 1교시, 즉 90분을 소화할 정도로 깊이 있고 세밀하게 가르쳤다. 예전에는 그의 설명이 때로는 너무 길고 따라가기 벅차서 중간에 졸기도 하고, 듣는 척하며 시간을 보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고, 연습문제 풀이도 막힘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케빈의 수업을 잘 따라가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의 설명을 어렵게 느끼는 이들은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거나 딴청을 피우는 모습도 보였다.
연습문제 풀이까지 마치자 어느새 수업이 끝났다. 원래 12시 30분에 종료인데, 오늘은 4분 늦은 12시 34분까지 이어졌다.
오래간만에 수업이라 내심 뿌듯하기도 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정말 내 청취력이 좋아진 걸까?’ 하는 자평을 스스로 해보았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뒤, 나는 가방을 챙기며 케빈에게 다가갔다. 그는 평소 입지 않던 군청색 코트를 입고 허리끈을 묶고 있던 그에게 “잘 어울리네요”라고 말을 건넨 뒤, 내가 몰타에 와서 처음엔 당신의 수업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요즘 들어 점점 더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러자 케빈은 내가 처음 수업을 들었을 때, “당신은 내 설명의 10% 정도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자신이 말했던 걸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조금만 더 집중하고 반복해서 연습하면 분명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는데, 지금은 그 노력의 결과를 조금씩 얻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말 그의 말처럼 내가 발전한 걸까? 혹시나 예의상 해준 말이 아닐까 싶었지만, 분명히 최근 수업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달라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변화가 아쉬워졌다. 한국에 돌아가려면 이제 고작 15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야 영어가 조금 들리는 듯한데, 이 시점에서 끝을 맺는 게 아깝기도 하고, 더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이미 회사에 복직원을 낸 상태라 계획을 변경하긴 어렵겠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영어를 쓸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될 걸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앞섰다. 큰 비용과 노력을 들였는데, 그대로 영어 실력이 사라진다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서도 영어 소모임이나 회화 모임을 찾아서 공부를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빈과 대화를 마친 후, 기분 좋은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
최근 새로 오픈한 펍 앞을 지나가는데, 예전에 인사를 나눴던 콜롬비아 출신 종업원 David와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그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 그가 추천해 준 파스타와 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오늘 하루의 작은 성취와 만족감을 소박한 음식으로 스스로에게 보답했다.
나를 위한, 나만의 조용한 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