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낯선 나라에서,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타국에서 처음 만난 콜롬비아인 요한은 나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고, 정서적으로도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때로는 형처럼, 또 때로는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그에게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같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함께 지내며 식사도 하고, 때론 한 방에서 잠을 자며 생활했지만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문득 그런 생각은 들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언젠가는 관계에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 생각이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 곧 접어두었지만, 예상보다 빨리 그 순간이 찾아왔다.
요한은 최근 발레타에서 면접을 보고, 좋은 결과를 받아 취업이 결정되었다. 그는 캠퍼스 숙소를 떠나야 한다며 집을 구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고, 내가 몰타에서 집을 구해본 경험이 있으니 여러 정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주기로 했다. 페이스북의 임대 정보 페이지들을 공유해 주었고, 과거 내가 방을 구할 때 알게 되었던 콜롬비아 친구 멜리사의 집도 소개해주었다. 그 방은 나도 한 번 고민했던 곳이었는데, 가격이 매우 저렴한 대신 여자와 방을 함께 써야 하는 구조라 결국 포기했던 곳이었다.
방값이 비싼 유럽에서는 한 방에서 성별이 다른 남녀가 같이 숙박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지만 우리 문화에는 그것을 수용할 수 없어서 포기한 곳 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그 방에 관심을 보였고, 멜리사의 집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멜리사에게 연락해 다음 날 오후 3시에 방문 약속을 잡았고, 나는 약속에 맞춰 멜리사에게 외출하지 말고 기다려달라는 부탁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다음 날, 브레이크타임에 요한과 만나 간단히 빵과 음료를 나누며 일정을 다시 확인했고, 그는 볼일을 본 뒤 나와 함께 멜리사의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수업을 마친 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인 오후 2시 30분이 넘어도 요한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시간 다 되어 간다”, “어디야 요한?”이라고 메시지를 보냈고,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약속을 취소하세요?”, “나는 거기에서 살 수 없습니다”, “St. Paul 지역에서만 집을 찾아야 한다고 전해주세요.”
당황한 나는 멜리사에게 약속 취소 메시지를 보냈고, 3시가 다 되어가서야 요한은 갑자기 “병원에 가야겠다”라고 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요한의 부탁으로 내가 직접 친구에게 연락하고, 약속까지 잡아줬는데 정작 그는 내 얼굴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요한은 멜리사를 모르지만 나는 그녀를 잘 안다. 주말마다 함께 배구를 하는 사이고, 내가 집을 구한다고 하자 본인의 집까지 소개해 준 좋은 친구다. 그런데도 요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을 깨버렸다.
나는 “그냥 가자. 계약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가 멜리사와 한 약속이니 얼굴을 봐서라도 가자”고 설득했지만, 요한은 “호텔에서 요구하는 지역이 St. Paul이라 어쩔 수 없다”며 끝내 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멜리사에게 “친구의 마음이 바뀌어 오늘 방문이 어렵게 됐다. 정말 미안하다”라고 몇 번이나 사과하고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그래서 요한에게 실망했다. 자신이 도와달라고 해놓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책임감 없이 행동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내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그날 저녁, 일본인 친구와 저녁 약속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변동을 대비해 아예 그 약속까지 취소하고 시간을 비워놨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기운 빠진 오후만 보냈다.
믿었던 친구에게 실망하니 마음이 허탈했고, 나라는 사람을 가볍게 여긴 것 같은 기분에 화가 났다. 차마 지금 말하면 감정이 먼저 앞설 것 같아 꾹 참았다.
그날 이후 수영장도 가지 않고 집에만 머물렀다. 다음날 요한은 “머리가 아프다”라고 톡을 보냈지만, 전날에는 치아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싶어, 퉁명스럽게 “어제는 치아가 아프다더니 오늘은 머리야?”라고 짧게 답했다.
요한은 장난 섞인 메시지를 계속 보냈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장난을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하다. 미움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 미움이 자라 독이 되듯 마음 전체를 잠식해 간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대상이 ‘나’라는 걸 깨닫는 순간 감정을 쉽게 누그러뜨리기 어려웠다.
예전 같았으면 잠들기 전 톡 몇 마디라도 주고받았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요한도 점점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