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막막함의 끝엔 언젠가 익숙함이 온다.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최근 랭귀지스쿨에서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입국한 아시안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한 달 전쯤 도착한 부부였는데, 그날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고 놀라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느 월요일 아침, 주말을 바쁘게 보내고 평소처럼 수업 시작 30분 전에 학교에 도착해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준비하려고 좁은 통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두 사람이 여유롭게 걷고 있었고, 그 모습이 못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앞지르려 해도 한 사람만 다닐 수 있는 통로라 그럴 수 없었는데, 내가 급한 기색을 보이자 남편이 배우자에게 눈짓으로 길을 비켜주라는 신호를 보냈고, 아내가 이를 알아차리고 옆으로 비켜주었다. 말 한마디 없이 눈치로만 주고받는 모습에 혹시 한국 사람인가 싶었지만, 바쁜 아침이라 물어볼 틈도 없이 그냥 지나쳤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그 부부가 랭귀지스쿨 입학처 사무실을 찾는 듯 1층에서 헤매는 모습이 보였고, 그 사이로 들려온 한국말에 ‘아, 한국 분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침 엘리베이터도 오지 않고 있어 도와주기로 마음먹고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네”라고 환하게 대답해 주었다. “입학처가 어디 있는지 안다.”라고 하며 내가 안내하겠다고 말하자,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게 되었다.


솔직히 랭귀지스쿨에는 한국인이 10% 정도 있고, 그중 대부분이 서울이나 수도권, 광역시 출신이라 나처럼 지방에서 온 사람은 드물었다. 이전에도 한국인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고향을 묻곤 했지만, 지금까지 6개월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 그런 기대는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 부부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반가워 보였고, 나도 문득 궁금해져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돌아온 답변은 놀랍게도 나와 같은 지역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서로 아는 사람도 나올 것 같은 거리감이었다. 나도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부부 역시 낯선 타국에서 첫날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난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곧 수업이 시작되었기에 부부를 입학처로 안내해 주고, 나중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날 수업이 끝난 뒤, 부부는 “원어민 교사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며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공감되던지. 나 역시 처음 왔을 때는 완전한 무장 해제 상태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레벨테스트를 본 뒤 배정된 반에서 이틀, 사흘 정도 수업을 들었지만, 교사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시차 적응도 덜 된 상태라 수업 중에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결국, 내 수준이 해당 반과 맞지 않다고 판단한 원어민 교사가 더 낮은 반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나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단 3시간 수업임에도 집에 돌아오면 스트레스를 받아 쓰러지듯 잠들곤 했다. 공부는 역시 때가 있는 걸까. 오랜 시간 책을 놓고 있다가 다시 시작한 공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버거웠고, 몸과 마음이 따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부부에게 말했다.

20240824_140404.jpg 나폴리 카세르타 궁전 갤러리


“처음엔 누구나 힘들어요.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나아질 거예요.” 나도 처음에는 한국인들에게 특히 취약한 듣기 능력 때문에 고생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대로 3~4개월 정도 지나니 조금씩 개선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레벨테스트를 다시 보고 반이 올라가고, 대화나 듣기 실력이 나아지는 걸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뿌듯함이 들었고, 이 공부에 조금 더 시간을 들여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그렇게 나 자신도 변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공부는 늘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그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가는 일,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했던 시간.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내가 선택한 공부, 내가 원해서 하는 학습인데도 재미없고 어렵다. 그만큼 낯선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일 때는 두렵고 막막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고, 그 결과는 결국 자기 노력에 달려 있다. 노력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그 결과가 보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이곳에 와서 공부를 시작한 것도, 직장에서 새로운 업무를 배우고 전문가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도, 모두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도망가고 싶고 돌아가고 싶었던 나의 유학생활도 이제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만큼 안정되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 되돌아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고, 이제는 누군가의 첫날을 응원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한편 나는 랭귀지스쿨의 여섯 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Advanced 반까지 가서 졸업하고 싶다는 작은 목표가 있다. 지금은 Intermediate 반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처음엔 담당 교사 아미라의 프랑스식 영어 발음이 익숙지 않아 적응이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안정되었고, 그제야 나는 스스로 마음먹었다. ‘이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교사를 바꾸지 말자.

내 의지로 선택하거나 바꾸지 않겠다’고. 당시에는 교사를 바꾸고 싶다는 당위성이 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 불리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우리는 채 1년도 안 된 학생들이고, 교사나 직원들은 이 학교에서 수년, 혹은 10년 이상 일해 온 경력자들이다. 그들이 보기엔 나의 결정이 이해되면서도 결국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힘들고 어렵더라도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보상이 돌아온다는 것을 조금은 믿게 된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시간이 만들어준 길 위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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