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정글에서
그는 기록상으로는 열세 시간을 잤다.
하지만 실제로 그날 밤, 루이스 베이커 상병이 가져본 잠은 길어야 다섯 분짜리 졸음들이 이어 붙은 것에 불과했다.
그의 기억도 그랬다.
열세 시간이라는 숫자 대신,
비 냄새와 포성, 흙 냄새와 악몽이 섞인 짧은 파편들만이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남아 있었다.
뉴브리튼 섬, 글로스터 곶.
1944년 1월.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이 전투의 일상이었다.
길은 곧잘 늪으로 변했고, 하늘은 구름이 아니라 안개와 연무로 막혀 있었다.
베이커는 군용 판초를 둘러쓰고 참호 안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비에 젖은 흙냄새와 썩어가는 잎사귀 냄새, 멀리서 희미하게 떠도는 탄약 냄새가 한꺼번에 그의 코를 찔렀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 섬은, 지옥이 물러난 자리에 남은 곰팡이야.”
그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느 날 밤, 담배를 돌리던 참호에서 툭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 뒤로 그 말은 부대 안에서 사실처럼 떠돌았다.
그날 아침, 베이커는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는 걸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며칠째 젖은 장갑을 낀 채로 지냈더니 피부는 데인 것처럼 일어나 있었고, 손톱 밑은 흙과 곰팡이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손 좀 봐, 상병.”
옆에 있던 해럴드 밀러가 말했다.
같은 분대의 기관총 사수였다.
볼에는 곰보 자국이, 헬멧 턱 끈에는 늘 씹다 만 껌이 그를 지켜주는 마냥 붙어 있었다.
“이러다 뉴욕 돌아가기도 전에 손가락 떨어져 나가겠어.”
“뉴욕은 네 거고, 난 시카고라니까.”
베이커가 낮게 투덜거렸다.
“그래, 그래. 너희 시카고 깡패들은 손가락 네 개만 있어도 잘 싸우지.”
밀러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어서 장난이 오갔겠지만, 비가 그런 것들을 깎아냈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은 간단했다.
오늘도 정글 안으로 전진.
일본군 방어진지 탐색 및 제압.
말은 짧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마주하는 건 총알보다 더 끈질긴 진창과 질병, 그리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포탄이었다.
베이커가 소속된 중대는 참호에서 일어났다.
소총을 추슬러 쥐고, 젖은 진창 위를 다시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정글은 미국 중서부의 어느 숲과도 달랐다.
베이커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사슴을 쫓던 숲은, 겨울이면 나무가 잎을 떨구고 하늘을 넓게 드러냈다.
그러나 이 섬의 나무들은 잎을 잃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위로 뻗은 가지와 잎 사이로 하늘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는 나뭇잎을 통과하며 잘게 찢어졌고,
지면에 닿을 즈음엔 연기처럼 흩어진 물방울이 되어 있었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포화도, 총성도, 비명도 이 섬에서는 언제나 빗소리 속에 섞여 들었다.
“분대 간격 유지!”
분대장의 낮은 외침이 뒤에서 날아왔다.
목소리는 금방 빗소리와 진창 소리에 씻겨 내려갔다.
베이커는 앞사람 판초의 끝자락만 간신히 따라갔다.
발밑은 보이지 않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어디까지 빠질지 모르는 진흙이 신발을 잡아끌었다.
하도 많이 넘어져서 이제는 넘어지는 법도 익혔다.
총만 머리 위로 번쩍 들고, 몸은 그대로 진흙에 맡겨 쓰러지는 법을.
왼쪽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젠장, 또 빠졌어! 이 망할 늪 같은 땅!”
물 튀는 소리와 함께 욕이 퍼졌다.
베이커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집 앞 골목길의 마른 아스팔트를 떠올리려 했다.
그 위를 맨발로 달리던 어린 자신을 그러나 떠오른 것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젖은 군화의 무게였다.
오전 내내, 그들은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때때로 포탄이 숲을 찢고 들어와
나무를 쓰러뜨리고, 진흙과 잎사귀와 지렁이와 살점이 한꺼번에 튀어 올랐다.
어느 지점에서,
마치 이름 그대로 ‘지옥의 문’이라 불릴 만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장교들은 말했다.
그러나 병사들에게는
그 지점이 어디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포탄이 어디 떨어지느냐’만이 문제였다.
“언제쯤이면 이 섬이 우릴 놔줄까.”
밀러가 판초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목소리마저 눅눅했다.
“이 섬이 우리가 놔주길 기다리지. 우리가 놔달라 빌어도, 얜 안 놓아줘.”
어디선가 대꾸가 돌아왔다.
이런 말들이 이곳에서 통용되는 농담이라는 걸 베이커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농담을 입에 물고 죽어갔다.
농담마저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각, 분대는 정글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앞쪽에서 손 신호가 이어졌다.
일본군 진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모두가 몸을 낮췄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잎사귀 위에 고인 빗물이 조심스레 움직이는 머리와 어깨 위로 툭툭 떨어졌다.
베이커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짧게 튀는 일본어,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어딘가에서 움직이는 포문의 마찰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분대장이 속삭였다.
“왼쪽으로 우회한다. 기관총 준비.”
밀러가 무릎을 굽혀 기관총을 앞으로 밀었다.
총열에 묻은 진흙을 손으로 조심스레 훔쳐냈다.
베이커는 옆에서 탄띠를 다시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손이었지만,
손등에는 불어터져서 갈라진 물집이 가득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외쳤다.
“포격이다! 엄폐!”
이어지는 시간은 늘 그랬듯이 순식간에 부서져 지나갔다.
하늘을 가르며 포탄들이 떨어졌다.
나무가 산산조각 났다.
대지를 두드리던 빗소리 위로 폭발음이 층층이 쌓였다.
베이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땅으로 파고들었다.
흙과 물이 한꺼번에 그의 등 위로 쏟아졌다.
귀가 먹먹해졌다.
시야가 번쩍였다.
포화는 한세월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섬에서 시간은 언제나 비처럼 잘게 찢어져 떨어졌다.
폭음이 잦아들었을 때, 정글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몇 그루의 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었고, 어디에선가 불길이 피어올랐다.
젖은 잎과 진흙에 억지로 들러붙는 불이었다.
비는 그 불을 끄려고 들었고, 불은 비를 뚫고 올라가려고 발버둥쳤다.
“밀러! 괜찮아?”
베이커는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곁에 있어야 할 밀러가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대신, 조금 떨어진 진흙탕 한가운데 검은 물체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찢긴 판초, 흙에 절은 머리카락, 한쪽 다리에 걸려 있는 탄띠.
베이커는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
“밀러…”
그는 진흙을 미끄러지듯 기어가 친구의 몸을 뒤집었다.
밀러의 얼굴은 흙과 피에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슴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파편 하나가
그를 정확히 관통하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젠장…”
베이커의 입에서 짧은 욕이 새어 나왔다.
밀러의 눈은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비 내리는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헬멧 턱끈 언저리에는 여전히 그를 지켜주는 듯 씹다 만 껌이 붙어 있었다.
베이커는
그 껌을 손가락으로 떼어내려다 말았다.
손이 떨렸다.
이 손으로 그는 한때 농구공을 던졌고, 아버지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고, 시카고의 겨울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지금 이 손은 친구의 죽음을 확인하는 손이 되었다.
멀리서 분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이커! 거기서 뭐 해? 이동해야—”
소리는 빗소리와 폭음의 잔향에 깎여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잔향처럼 들려왔다.
베이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밀러의 눈 위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눈꺼풀이 조용히 내려갔다.
그 순간, 베이커는 이상하리만치 깊은 정적을 느꼈다.
비도, 포성도, 동료들의 발소리도 모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세상의 볼륨을 서서히 줄이고 있는 듯했다.
밀러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베이커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문득, 그는 아주 선명하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순간은, 밀러의 인생이 끝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굳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그는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섬에서도,
다른 섬에서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웃고, 울고,
계약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모습.
그는 그 모든 순간의 주변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밀러가 죽어가던 이 순간만큼 자신의 존재가 날카롭게 느껴지는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
비가 그의 헬멧을 두드렸다.
차가운 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지금,
이 진흙 위에
내 남은 삶 전체를
한 번에 올려놓고 있는 셈이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순간을 그저 ‘전투 중 하루’로 기억할 수도 있고, ‘친구 하나 잃은 날’로 남길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이 장면이 평생 되돌아올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뉴욕의 거리든, 시카고의 주방이든, 전후 어느 날, 자신이 서 있는 바닥이 문득 이 섬의 진흙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그는 오늘의 비를 떠올릴 것이다.
밀러의 눈 위로 떨어지던 그 비를.
“베이커! 움직여!”
분대장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훨씬 가까이에서 터졌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젠장, 미친자식아! 여긴 더 있을 수 없어!”
베이커는 숨을 들이켰다.
숨이 가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밀러의 몸 위에 판초를 조심스레 덮어 주었다.
판초 위로 비가 한층 더 거세게 내려박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친구의 발끝을 한 번 바라보았다.진흙 속에 반쯤 잠긴 군화.
그 옆에, 누군가가 떨어뜨린 담배 한 개비가 젖은 채로 누워 있었다.
베이커는 몸을 돌려 분대 쪽으로 달려갔다.
발밑의 진흙이 무겁게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그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 이건 내 몫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밤, 임시 진지 안에서 그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한 곡의 반복되는 음악처럼 귀를 때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오늘 몇 명 잃었지?”
“모르겠어. 근데 더 잃겠지. 내일도, 모레도.”
짧은 웃음이 흘렀다.
웃음 소리마저 습기에 젖어 있었다.
“이 전쟁 끝나면 뭐 할 거냐, 베이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볍게 농담을 던졌을 것이다.
시카고로 돌아가 아버지 식당을 물려받겠다거나,
뉴욕으로 가 도시를 한 번 제대로 구경하겠다거나.
그러나 지금, 그는 아무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대신, 낮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진흙 속에 누워 있던 밀러.
그 위로 내리던 비.
자신이 그의 눈을 감겨 주던 순간.
그 짧은 순간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자신과 친구만이
정글 한가운데 홀로 남아 있던 감각.
아마도, 그의 인생은 그 장면에서 이미 방향이 정해져 버린 게 아닐까.
비 내리는 밤 그는 담요를 끌어당기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주 작은, 그러나 또렷한 약속 하나를 세웠다.
만약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나는 이 장면을 잊지 않겠다.
전쟁의 영웅담 대신, 이 섬의 진흙과 비, 그리고 한 친구의 눈꺼풀을 기억하겠다고.
그는 자신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조금씩 덜 선명하게 기억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약속이 그의 존재 전체를 한 방향으로 정렬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 뒤,
그가 정말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종종 물었다.
“거기선 어땠어? 제일 기억에 남는 전투는 뭐야?”
베이커는 잠시 생각하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누군가는 영웅적인 전과를 듣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전쟁의 참혹함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가 떠올리는 건 언제나 비 내리던 그날, 정글 한가운데서 친구의 눈을 감겨 주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한 문장을 속으로 반복했다.
'내 존재는 그날, 그 비 속에서 한 번 정점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 한 번이면 평생을 버티기에 충분하다'고
조심스럽게 믿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