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순간들 3편

장벽이 열리던 밤

by 머리카락속의 바람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총보다 열쇠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마르틴 클라인 중위는 보른홀머 거리 검문소의 야간 책임자였다.

1989년 11월 9일, 목요일.

그는 그 날짜를 평생 잊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그때는 아직 몰랐다.

저녁 근무 교대는 언제나처럼 시작됐다. 철문, 쇠창살, 시멘트 기둥, 철조망.


담배 연기와 젖은 콘크리트 냄새.
장교실 밖 복도에는 젊은 병사들이 신발을 끌며 오갔다.


“중위 동지, 오늘도 조용하겠죠?”


막 전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병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마르틴은 잠깐 그를 쳐다봤다.
볼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얼굴.
장갑 너머로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목요일 밤이야, 라이너. 사람들은 내일 일을 생각하면서 일찍 자러 들어가.
장벽을 넘는 대신 말이지.”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중위 동지.”


라이너는 어깨를 조금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틴은 스스로에게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오늘 밤도 평소처럼 지나갈 거라고 그는 이미 너무 많은 밤을 장벽 위에서 보냈다.

서른아홉. 군 복무 열여섯 해.

장벽이 세워질 때 그는 열한 살이었고,

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열아홉이었다.

그의 청춘 대부분은 이 콘크리트와 철조망 사이에서 녹아내렸다.

집에서는 아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마르틴, 오늘 당 회의 중계 있대. 뭔가 중요한 발표라던데?”


근무 나가기 전,

아내 안네가 부엌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중요한 발표라면 우리한테도 떨어지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외투를 걸쳐 입었다.

당의 발표는 늘 많았고, 그 발표가 그의 일상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저녁 7시를 조금 넘겼을 때,
경비실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잡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권 발급과 출국 관련 규정 개정…모든 동독 시민은, 적절한 신청 절차를 거쳐…”


일병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중위 동지, 이거… 들리십니까?”


마르틴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라디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잠깐만, 볼륨 좀 올려.”


라디오의 다이얼이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즉시 발효되는 것으로…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낯익은 당 대변인의 목소리가 애매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경비실 안 공기가 잠깐 멎은 것 같았다.


“즉시 발효…?”


부사관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중위 동지? 국경을 연다는 겁니까?”


모두의 시선이 마르틴에게로 쏠렸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그런 중대한 결정이 있었다면,
최소한 서면 지시나 전화 한 통쯤은 먼저 내려왔을 것이다.


“라디오 하나 보고 흥분하지 마. 정확한 지시가 올 때까지는 규정대로 한다.”


그는 짧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속이 아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8시가 넘어가자 검문소 앞 인파가 늘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일 아닌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도 가끔, 친척 방문이나 긴급한 사정으로 서류를 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분명히 달랐다.

누군가는 두꺼운 코트를 걸쳤고, 누군가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땀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단한 짐도 없었다.
작은 가방 하나, 급히 챙긴 서류 몇 장뿐인 사람들도 많았다.


“저… 라디오에서 들었는데요.”


첫 번째로 창구에 선 남자가 말했다.


“지금부터, 서독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남자의 손에는 조금 구겨진 신분증과 여권 신청서 복사본이 들려 있었다.


“정확한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마르틴은 답했다.


“돌아가서 내일 정상적으로 절차를 밟으십시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즉시 발효’라고 했습니다. 우린 다 들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안 됩니다.”

마르틴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규정을 알고 있었고, 명령 체계를 알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체제가 그의 입을 빌려 말하는 소리였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 뒤로 물러났다.
그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들었지? 역시 저쪽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나 봐.”

“그래도 기다려 보자. 뭔가 바뀐 건 맞을 거야.”


말들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몰려왔다.

청년들, 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 지팡이에 몸을 기댄 노인들까지.

어떤 이들은 울먹였고, 어떤 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웃고 있었다.


“중위 동지,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라이너가 다가와 말했다.


“점점 더 모이는 것 같습니다.”

마르틴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철문 앞 넓은 공간이 사람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 위로 가로등 불빛이 떨어졌다.

눈, 코, 입, 각자의 표정이 한 덩어리의 파도처럼 흔들렸다.


밤 9시.
전화가 울렸다.

상부였다.
지시를 기다리던 마르틴은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보른홀머 검문소입니다. 현재 민간인 다수가… 예,
라디오 보도를 듣고 모인 것으로 보입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은 알고 있다. 일단 평소대로, 통행 허가가 있는 자만 통과시키도록.”

“하지만 동지,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방송을 믿고….”

“평소대로다, 중위. 명령은 바뀐 것이 없다.”


툭, 소리가 나며 전화가 끊겼다.

마르틴은 수화기를 잠시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대로.

그러나 오늘은 분명 평소 같은 밤이 아니었다.

10시를 넘기자 사람들은 더 이상 조용히 서 있지 않았다.


“우릴 내보내라!” “장벽을 열어라!”

구호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손에 든 맥주병을 흔들었고, 누군가는 서독에 있는 친척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간절하게 소리쳤다.


“전부 폭도는 아닙니다.”

라이너가 중얼거렸다.


“저기, 아이도 있어요.”

철문 너머, 어린 여자아이가 어른들 다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깨에는 작은 가방, 한 손에는 인형.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딸을 품에 안고 조심스레 뒤로 물렸다.

마르틴은 눈길을 피했다.


“무장은 유지하되, 방아쇠에 손가락 올리지 마.”


그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누가 도발하더라도 먼저 쏘지 마라. 우린 국경수비대지, 사형집행인이 아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조금 안도하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안도와 함께 다른 종류의 두려움도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이렇게 망설이는 모습을 위에서는 어떻게 기록할까.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 검문소 안 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더 높은 곳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목소리는 거칠고 단호했지만, 어딘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상황 보고.”

“현재… 천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계속해서 더 모이는 중입니다.”

마르틴은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질서는 유지되고 있나?”

“지금까지는 큰 충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요구는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잡음이 들렸다.

“…종합적으로 논의 중이다. 명확한 지시가 내려갈 때까지 어떤 일도 독단적으로 하지 마라.”

독단적으로.

그 단어는 거의 경고처럼 들렸다.


“그럼, 발포에 대한 지침은…?”

마르틴이 조심스레 물었다.


“…절대 먼저 발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경비병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위협이 가해지면, 규정에 따라 대응하라.”

전화는 또다시 끊겼다.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밤은 깊어졌고, 사람들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가까운 아파트에서 누군가 라디오를 듣고 내려왔고, 친구에게 전화해 “지금이래”라고 말했고,
그 친구는 다시 다른 친구를 깨웠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지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지금 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갇힐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람들을 장벽 앞으로 밀어냈다.

철문 앞 군인들의 얼굴도 점점 굳어갔다.

라이너는 손에 쥔 자동소총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중위 동지…”

그가 낮게 불렀다.


“우리가… 만약 실수하면 어떻게 될까요?”


“실수하지 마.”

마르틴은 짧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속에서는 어떤 것이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 순간 우리가 하는 일이 나중에 ‘실수’와 ‘정답’으로 깔끔히 나뉠 수 있을까.

밤 11시 30분.

마르틴은 철문 위 감시 플랫폼에 올라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뚫린 하늘 아래, 수백 개의 얼굴.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젊은 남자는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양팔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열어라! 우릴 나가게 해라!”

구호가 한 덩어리의 파도처럼 검문소를 밀어붙였다.

그는 군중을 내려다보며, 문득 한 가지 상상을 했다.

저 사람들 사이에 안네와 클라라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클라라.
열 살짜리 딸.

지난달 생일에 선물로
반파시스트 보호장벽 모형이 그려진 퍼즐을 주었다.


“아빠가 지키는 거야?”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을 때,
마르틴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아빠는 이쪽을 지키고 있지.”

결국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이쪽.

저쪽이 아니라.

감시 플랫폼에서 내려오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아래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클라인 중위님!”

경비실에서 뛰어나온 부사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사람들이 철문을 밀기 시작했습니다! 몇몇은 바리케이드를 넘으려 하고… 여기서 더 막으면
충돌이 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함성 소리가 더 커졌다.

“열어라!”
“지금 열어!”

말들이 폭발하듯 번졌다.


라이너를 비롯한 병사들이 철조망 아래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분노와 혼란이 한꺼번에 떠올라 있었다.


“무장 유지! 하지만 쏘지 마!”

마르틴이 소리쳤다.


“누구든 먼저 방아쇠 당기면 군법회의에 세우겠다!”

병사들 사이로 짧은 웅성거림이 스쳤다.


그때였다.

사람들 틈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솟구쳤다.

“애들이 기다린다! 우리 손주들이 저쪽에서 기다린단 말이다!”


흰 머리의 노인이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구겨진 가장자리, 흑백으로 찍힌 어린아이 둘의 모습.

“난… 난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보고 싶어!”

노인의 목소리가 끝에서 부서졌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눈시울을 훔쳤다.

어떤 젊은 여자는 “우리가 원하는 건 그뿐이에요!”라고 외쳤다.


서독에 있는 가족,
친구,
연인.

사진 속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사진 속에만 머물지 않을지도 몰랐다.


마르틴은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클라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교복을 입고 둘러맨 책가방, 묶지 않은 금발 머리카락, 문을 나서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던 작은 손.

만약 오늘 밤, 그 아이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데 자신이 팔을 뻗지 않는다면 그는 어떤 아버지가 되는 걸까.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둘로 나누어 바라보았다.


동독 국경수비대 중위
당과 국가를 위해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군인 마르틴.

그리고
안네의 남편
클라라의 아버지
이 도시에서 태어나
이 도시에서 늙어갈
한 사람 마르틴.

지금까지의 삶은 첫 번째 쪽으로 더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검문소 앞에서 성난 군중과 울부짖는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번째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는 듯했다.


나는 누구인가.

명령만 기다리는 손인가, 아니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사람인가.

어디선가 병사 하나가 낮게 물었다.


“중위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목소리에는 공포와 기대가 함께 섞여 있었다.


“우리가 버티지 못하면 이 문은 부서질 겁니다.”

부사관이 덧붙였다.

“그 전에 우리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결정.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상부의 지시는 여전히 모호했다.


‘평소대로.’
‘독단적인 행동 금지.’
‘발포는 신중히.’


하지만 평소 같은 밤이 아니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독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이 체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침묵 위에 세워져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그 침묵의 대열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 한 발짝 바깥으로 나갈 것인가.

시간이 느려졌다.

구호 소리가 멀어지고,
병사들의 숨소리가
오히려 또렷해졌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목에 걸린 휘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주머니 속 열쇠의 감촉이
강하게 느껴졌다.

철문을 여는 열쇠.
그동안 수없이 확인만 했지
‘연다’는 의지를 가지고 돌려본 적은 없는 금속 조각.

지금 이 순간,
이 열쇠 하나에
수천 명의 인생이 매달려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 열쇠를 쥔 자신의 인생도.


마르틴은 결국 아주 짧은 생각 하나에 도달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열릴 문이라면, 누군가는 첫 번째로 돌려야 한다.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괜찮지 않더라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모두 뒤로.”

그가 말했다.

병사들이 한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멈칫했다.


“중위님?”

부사관이 되물었다.


“뒤로 물러서. 철문에서 세 걸음 이상 떨어져. 무기는 내리고.”

병사들이 망설이다가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부터 발포는 절대 없다. 어떤 도발에도.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책임이다.”

그는 천천히 철문으로 걸어갔다.


철문 안쪽, 두꺼운 쇠기둥 옆에는 묵직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마르틴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울렸다.

사람들의 함성은 잠시 멎었다.

수백 개의 눈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열쇠가 자물쇠 안으로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
수천 명의 삶보다
자신의 계급장이 먼저 떠올랐다.

상부의 징계,
군에서의 경력,
당에서의 위치.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듯
또 다른 장면 하나가 올라왔다.

클라라가 학교에서 돌아와 벗어 던진 가방을 가지런히 놓으며 그에게 물었던 순간.


“아빠는… 사람들 지켜주는 일을 하는 거지?”

그는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해 준 적이 없었다.

지금,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래, 오늘만은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는 손목에 힘을 주어 열쇠를 돌렸다.

철제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자물쇠가 풀렸다.


“문을… 여십시오.”


마르틴은 누구에게라기보다 자신에게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철문을 두 손으로 밀었다.

처음에는 조금,

그다음에는 더 크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옆으로 움직였다.

장벽 사이에 틈이 생겼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믿지 못한 듯 그 틈만 바라봤다.

그러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한 발 내딛었다.

그 뒤를 또 다른 발이 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물길이 터지듯 몸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명 대신 울음과 웃음과 반쯤 믿기지 않는 탄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서독 쪽으로 달려가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철문 앞에서 아까의 노인이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진 한 장을 쥐고 있었다.

노인은 장교복을 입은 마르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둘 사이 거리가 이상하리만치 가깝게 느껴졌다.

노인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고맙소.

소리는 환호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마르틴은 그 두 글자를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이상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수많은 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장벽 위에서 보낸 겨울, 훈련소의 먼지 냄새, 상부의 지시, 당 회의를 다녀온 날, 집에서 안네와의 말다툼, 클라라의 웃음.

그 모든 시간이 지금 이 밤으로 한꺼번에 수렴해 오는 것 같았다.

길게 늘어져 있던 선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드는 느낌.

아마 내 인생은 지금 이 순간을 향해 여기까지 흘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전까지의 모든 선택과 망설임이 철문이 열리는 몇 초를 향해 조용히 정렬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밤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폐를 스쳤다.

그럼에도 가슴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중위님!”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이러다 큰일 납니다! 상부가 알게 되면! 어떡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알겠지.”

마르틴은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알게 될 거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그는 열려 있는 철문을 가리켰다.

이미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문을 지나 다리 위를 건너가고 있었다.

지금 와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더 쏘지 않는 것뿐이다.”

그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총을 내려. 오늘 밤 이곳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병사들 얼굴에 섞인 감정들이 스쳤다.

혼란, 두려움, 그리고 분명한 안도.

라이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보호장벽으로 몰려드는 인파에 시선을 돌렸다.


그날 밤, 보른홀머 거리 검문소는 동독에서 처음으로 장벽이 열린 관문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다른 단어들로 포장된 기사들이 실릴 것이고, 나중에 역사가들은
이 날을 긴 과정의 일부로 분석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틴에게 그날 밤은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이 처음으로 완전히 ‘나’라는 선택을 했던 단 한 번의 순간으로 남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의 머리가 희끗해졌을 즈음
베를린 도심에는 장벽이 있었던 자리에 기념비와 안내판이 세워졌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웃었고, 가이드는 말했다.


“여기가 바로 1989년 11월 9일, 처음으로 장벽이 열린 곳입니다.”


마르틴은 사람들 뒤쪽에서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어떤 젊은이가 물었다.


“그때 문을 연 사람은 누구였나요?”

가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러 보고가 있고, 여러 이름이 거론됩니다. 역사는 늘 그렇죠.
정확히 한 사람의 이름으로만 끝낼 수 없는 순간도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웃으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마르틴은 잠시 그 자리에 혼자 남았다.

눈앞에는 한때 철문과 철조망이 있던 자리가 얇은 표식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는 발끝으로 옛 경계선을 가만히 밟아 보았다.

발 아래 느낌은 그저 평범한 콘크리트였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는
그날 밤의 차가운 공기와
수백 개의 발소리,
울음과 웃음이
아직도 어렴풋이 겹쳐 있었다.

내 존재는

그날 밤, 이곳에서
한 번 정점에 다녀왔다.

그는 조용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한 번이면 평생을 버티기에
충분했다고, 늦게나마 인정해 보기로 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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