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 [분류]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제 또래라면 한 번쯤은 교실 TV로 이 프로그램을 봤을 겁니다. 웅장하거나 감성적인 배경음악, 성우의 내레이션 하나 없이 오직 강렬한 이미지와 영상, 그리고 심장을 툭 치고 들어오는 짧고 굵은 흰색 자막. 2005년부터 시작된 EBS의 간판 교양, 바로 <지식채널e>입니다.
약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세상의 지식과 통찰을 압축해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은 50분 분량이 정석인 방송가에선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이야 1분 미만의 숏폼 콘텐츠가 넘쳐나지만, 짧은 지식 콘텐츠의 원조는 누가 뭐래도 <지식채널e>라고 생각합니다. 짧지만 보고 나면 기억에, 마음에 오래 남아 팬들도 많죠. 저 역시 고향 집 서재에 이 프로그램의 내용을 담은 단행본이 시리즈별로 꽂혀 있을 만큼 열렬한 팬이었는데요.
아니, 그런데! 세상 적당히 살고 볼 일이죠.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네. 제가 이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가 돼버린 거죠.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냐고요?
이야기의 시작은 제가 한창 여행자 모드로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1년 중 1~2달은 가능하면 꼭 해외여행을 떠납니다. 지난 10달 동안 몸이 부서져라 일한 저에게 주는 보상이자,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는 시간이죠. 당시에도 한국과 8시간 시차가 나는 낯선 땅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메일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나프리 작가, 여행 잘 마무리 중? 혹시 프로그램 같이 해볼 생각 있어?”
EBS에서 알락꼬리마도요를 비롯한 철새 관련 다큐를 만들 때 인연이 된 PD님의 연락이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의심 + 겁부터 났습니다. 방송가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EBS는 유독 진입장벽이 높기로 유명했거든요. 'EBS는 쓰던 메인 작가님만 쓴다더라' '그 작가님들이 프로그램 3개 이상씩 한다더라' JTBC에서 만난 EBS 프로그램을 하던 작가님에게도 그런 일화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에 더 무서웠죠.
'내공 깊은 고연차 작가님들이 꽉 잡고 있는 곳에... 감히 내가?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동경해온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기회를 발로 걷어찰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죽어라 최선을 다하겠지만, 결과가 별로라면 나를 뽑은 CP님의 안목 탓이지 뭐!"
이런 대책 없는 생각으로 특유의 '못 먹어도 고' 정신을 다시 발휘해 겁도 없이 수락을 해버렸죠. 그렇게 저는 여행 가방을 풀기도 전에 <지식채널e> 인문학 팀의 메인 작가로 합류했습니다. 지식채널e는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등 여러 팀이 있었는데요. 인문학 팀은 역사, 철학, 문학을 넘나들며 현대인에게 필요한 통찰을 5분 영상으로 압축해 전달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인문학 팀은 총 세 팀이었습니다. 한 팀은 피디, 메인 작가, 취재 작가로 이뤄져 있고 이 팀은 매주 1회 CP와 전체 회의를 하고 1편 씩 만들어 내는 게 미션이었습니다. 회의 때 메인 작가와 취재 작가가 찾아온 아이템을 컨펌 받고 그 후 컨펌 받은 내용으로 메인 작가가 원고를 쓰는 식이었죠.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도서관, 서점에 거의 살다시피 했죠. 단순히 지식을 요약하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아는 내용에서도 새로운 관점을 찾아내야 했으니까요.
팬심으로 볼 때는 마냥 감동적이었던 5분의 영상이, 만드는 입장이 되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직전까지 70분짜리 긴 호흡의 다큐멘터리와 5분으로 압축된 영상은 다른 힘듦이 있더군요. 5분 안에 기승전결 및 감동을 다 담아야 했기에 핵심을 깎고 또 깎으며 다듬어야 했습니다. 설명하고 싶은 욕심을 쳐내고,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가장 날카롭고 시적인 표현으로 응축해서 딱 한 두 줄의 자막으로 만들어야 했죠.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야말로 보는 것과 만드는 것의 천지 차이를 몸소 느껴봤다고 할까요ㅎㅎ
'짧게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작가들의 명언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쓴 원고는 단행본 안에 포함되어 생애 첫 인세도 받았는데요. 매년 금액은 점차 줄어들지만 통장에 찍히는 인세 내역을 볼 때면 뿌듯함이 밀려옵니다. 제가 쓴 원고가 <지식채널e> 단행본에 실려 누군가의 서재에 꽂혀 있다는 증거니까요. 성공한 덕후로서 이보다 더 확실한 트로피가 또 있을까요?
<지식채널e>를 만들며 배운 건 단지 방송 구성법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남기기 위해, 덜 중요한 아홉 문장을 과감히 버리는 용기. 그 '덜어냄의 미학'이 방송뿐만 아니라 제 인생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책임지는 마음으로 완성했던 그 시간들. 바라보는 팬에서, 만드는 작가로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짧고 좋은 것'들은, 누군가의 '길고 지루한' 고민 끝에 탄생한다는 사실을요. 고단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싶은 일에 주저하지 마세요! 그 안에서 겪는 치열한 고통이 훗날 되돌아보면 가장 반짝이는 순간으로 추억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