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작가도 드라마를 쓸 수 있을까요?

chapter 2 [분류]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by 나프리

방송 작가의 세계는 크게 두 대륙으로 나뉩니다. ‘드라마’와 ‘비드라마’. 비드라마는 우리가 흔히 아는 교양, 예능, 라디오 등을 포함하는데요. 재미있는 건, 비드라마 대륙에 사는 작가들 중 상당수가 마음속에 드라마라는 신대륙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문과를 나왔지만 문학보다는 어법을 파고들었고,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정작 대본 쓰는 법은 배운 적 없는 '순수 구성 작가'였던 저 역시 그런 꿈을 꿨습니다. '드라마 작가'란 타이틀, 넘 멋지잖아요ㅎㅎ 감사하게도 방송 밥을 먹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기'를 글로 써야 할 순간들이 찾아오더군요.


시사 프로그램을 할 때는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재연 코너를 썼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드라마라기보단 ‘사실에 기반한 상황극’이었죠. 하지만 진짜 드라마 대본을 쓰게 된 건 약 4년 전, 관공서의 홍보 콘텐츠를 맡으면서부터였습니다.

"작가님, 이번엔 드라마 형식으로 가시죠."


이 한마디에 저는 졸지에 '드라마 작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아동 권리 콘텐츠(10분), 국토교통부의 주택 정책 3부작(각 10분), 그리고 로맨스 12부작(각 20분 내외)까지!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썼냐고요? 방송가에는 "필요하면 어떻게든 해낸다"라고 쓰고 "까라면 깐다"라고 읽는 불문율이 있거든요. 게다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훌륭한 레퍼런스들을 닥치는 대로 분석하며 맨땅에 헤딩을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현직 고수들에게 얻은 조언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죠. 그때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됐던 조언 몇 개를 풀어봅니다.


첫째, 이름 가리고 맞혀봐! (캐릭터성)

현직 드라마 감독님이 해주신 말씀입니다. 좋은 대본인지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름(화자)을 가리고 대사만 읽어보는 것’이래요. 누가 하는 말인지 헷갈린다면 실패, 대사만 봐도 "아, 이건 철수네!", "이건 영희 말투네!" 하고 딱 보이면 성공이라는 거죠. 요즘 K-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도 바로 이 확실한 '캐릭터성' 덕분이라는데, 막상 써보니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이 기준으로 봤을 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극한직업' 대본도 아쉬운 점이 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둘째, 개연성보다 중요한 건 '말맛' (대사)

웹소설 경험이 있는 지망생 언니는 '맛있는 대사'를 강조했습니다. 공모전 심사위원들은 구성이 조금 엉성해도 대사가 기가 막히면 뽑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구성은 수정해서 고칠 수 있지만, 작가 고유의 '대사 센스(말맛)'는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나요?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드라마 제작사에서 근무하는 피디님께도 똑같이 들었습니다. 심사할 때 대사 수정보다는 전체 구성 보안이 더 쉽다고 생각한다더군요.


사실 저처럼 일로 잠깐 경험하는 것 말고, 아예 구성 작가에서 드라마 작가로 전향해 대성공을 거둔 케이스도 많습니다. <시그널>, <킹덤>의 김은희 작가님도 예능 작가 출신으로 유명하죠. 구성 작가 출신이 드라마를 쓰면 확실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취재력'과 '구성력'입니다. 바닥까지 훑는 자료 조사 스킬 덕분에 극의 디테일이 살고, 논리적으로 원고를 쓰던 습관 덕분에 개연성 구멍이 적다는 장점이 있죠.

스크린샷 2026-02-14 오후 9.54.48.png 제가 썼던 원고 중 일부

저의 '어쩌다 드라마' 도전기는 다행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비록 정통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형식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이 꽤 짜릿했거든요.


사실 구성 작가는 늘 '팩트'라는 감옥에 갇혀 살잖아요.


그런데 드라마를 쓰는 순간만큼은 내가 신이 되어 세계를 창조하는 짜릿함이 있더군요. 내 손끝에서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니까요. 그 해방감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요즘은 1분 내외의 '숏폼 드라마'가 대세라고 하죠? 숨 막히게 빠른 전개와 도파민 터지는 자극적인 맛이 특징인데요. 긴 호흡의 정통 드라마든, 짧고 강렬한 숏폼 드라마든 결국 본질은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 교양 작가인 제가 썼던 정부 정책 홍보물도 결국은 딱딱한 정보를 '사람의 이야기'로 번역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플랫폼은 계속 변할 겁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는 대중의 본능은 변하지 않아요. 어떤 그릇(장르)에 담기든 맛있는 요리(글)를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든 환영받는 셰프가 될 수 있습니다. 일단 한번 질러보세요. 생각보다 당신의 '말맛'은 꽤 훌륭할지도 모르니까요.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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