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콘텐츠는 처음이라

chapter3 [특송] 까다로운 고객을 위한 맞춤 배송

by 나프리

2020년, '기업 콘텐츠'를 처음 해봤습니다. 방송국 울타리 안에서만 콘텐츠를 만들던 제게 새로운 문이 열린 거죠. 기업도 방송국과 비슷한 또 다른 정글이더군요! (역시 남의 돈 버는 일은 쉬운 게 없어요ㅎㅎ)


시작은 SK 계열사에서 사내 콘텐츠를 만들던 PD 친구의 연락이었습니다.


"나프리~ 너 영화 리뷰 콘텐츠 해본 적 있어?"

"없지?"

"....ㅋㅋㅋㅋㅋㅋ"


영화 리뷰는 제가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기도 했고, 그래도 방송 짬바가 있는데 어렵겠나 싶어 덥석 물었습니다. 기획안 통과부터 원고 작성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역시 난 해낼 줄 알았어'하며 뿌듯해하던 것도 잠시, 촬영 현장에서 MC가 프롬프터를 보고 내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걸 보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활자로 볼 땐 괜찮았던 문장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턱턱 걸리는 느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죠.


이 일을 경험하고 부터는 섭외된 캐릭터를 흉내내며, 쓴 원고를 무조건 두 번 이상 소리 내서 읽고 수정합니다.


그다음 만난 클라이언트도 SK의 다른 계열사였습니다. 이번엔 사내 캐릭터를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조금 더 말랑한 기획이었죠. 그런데 웬걸, 이곳엔 '방송 심의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강력한 '사내 검열팀(?)'이 존재했습니다.

"회사 전 부서가 여기서 다 컨펌 받습니다. 작가님도 예외는 아니에요."


사내법(?)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요. 따라야죠. 그런데 이게 참 현타가 많이 오더라고요. 맞춤법은 기본, 사내에서 지양하는 표현, VIP(회장님)가 싫어하는 뉘앙스까지... 제 원고는 늘 시뻘건 빨간펜 자국으로 난도질당해서 돌아왔습니다. 흡사 초등학생 때 받아쓰기 빵점 맞은 시험지를 받아든 기분이랄까요. 자괴감에 시달리다 결국 세 편 만에 백기를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더 훌륭한 작가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 후로도 여러 대기업의 문턱을 넘나들었습니다. 처음엔 압도적인 규모의 사옥과 공항 검색대 수준의 보안 절차, 휴대폰 카메라에 붙는 보안 스티커 때문에 잔뜩 위축되더군요. 하지만 진짜 난관은 '소통'에 있었습니다. 기업의 홍보팀이나 미디어팀 담당자들은 대게 영상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시사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매직'을 요구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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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작가님, 사장님 연설 영상에서 '우리 사원'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를 빼주세요."

"...네? 그럼 엄청 어색할 텐데요? 영상도 튈 거고요."

"에이~ 그래서 전문가분들한테 부탁드리는 거잖아요."

"(하아...) 일단 해보겠지만, 아마 이상해 보여서 못 쓸 확률이 큽니다."


사례 2

"인터뷰이 얼굴에 붙은 저 머리카락 한 올, 좀 지워주세요."

"20분 다요? 영상이라 프레임 단위로 작업해야 해서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는데요..."

"그래도 우리 회사 얼굴로 나가는 건데 보기 안 좋잖아요. 다 지워주세요."

"............네. 일단 해보겠지만 말씀하신 마감 시간에 맞추기 힘들 수 있습니다."

"그건 안 돼요. 보고를 이미 해서, 마감은 맞춰주세요."


'아니 이걸 어떻게 하라고!!!!!'


라는 마음이 드는 황당한 요구들... 정말 많았습니다. 이 외에도 오전 8시부터 새벽까지 수시로 연락하는 담당자, 새로 온 팀장님을 위한 하반기 콘텐츠 전략 PT를 하루 전날에 준비하라고 연락오는 담당자, 사내에서만 사용하는 이상한 콩글리시가 가득 섞인 이메일 등.


처음엔 이런 요구와 태도가 그저 '갑질'이나 '무지'에서 비롯된 거라 생각해서 답답했습니다. '아니, 우리가 무슨 도깨비방망이인 줄 아나!' 하고 속으로 욕도 많이 했죠.


그런데 여러 기업과 부딪히며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영상의 '재미'나 '완성도'가 아니라, '안전'과 '리스크 관리'라는 것을요. 방송국 놈들 눈엔 어색한 편집점보다, 사내에서 지적 받는 일이 생기는 게 더 큰 대형 사고인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 화려하고 거대한 사옥 안을 다시 찬찬히 둘러보니 묘한 감정이 들더군요. 보안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휴대폰을 들고, 혹여나 사장님 심기를 거스를까 봐, 혹은 회사 이미지에 아주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봐 노심초사하며 제게 '빨간펜'을 들이밀던 그 얼굴들. 자기 책임이 될까봐 말을 바꾸는 담당자들. 결국 그들도 위에서 지시하면 어떻게든 해내야 하고 작은 실수 하나에 밥줄이 달린 평범한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방송국 놈들 눈에는 영상의 흐름이 툭툭 끊기는 게 대역죄지만, 그들의 생태계에서는 회장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이나 사장님의 말실수가 훨씬 더 끔찍한 대역죄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결국 기업 콘텐츠를 만드는 외주 작가로 일한다는 건, 단순히 기획안을 잘 쓰고 원고를 멋지게 뽑아내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정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수정 요구에 한숨이 푹푹 쉬어지고 "제가 두 손 두 발 다 들 테니 다른 작가 구하세요!" 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 너희도 거기서 살아남느라 참 고생이 많다" 하는 짠한 동질감 한 스푼. 그 마음이 이 팍팍하고 까다로운 외주 생활을 버티게 하는 뜻밖의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오늘도 각자의 정글에서 클라이언트의, 혹은 상사의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과 피 터지게 씨름하고 있을 세상의 모든 '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까다로운 맞춤 배송, 우리 오늘도 무사히 완료해 보자고요!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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