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분류]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프리랜서 방송 작가로 살다 보면 참 신기한 경로로 일거리가 들어오곤 합니다. 지인의 추천이나 피디님의 연락은 양반이죠. 가끔은 우주가 저를 돕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KBS에서 '그린 에너지' 관련 2부작 다큐멘터리의 서브 작가로 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략 3개월 정도 일을 했었죠. 당시 대선배 메인 작가님을 모시고, 저는 발에 땀이 나도록 섭외 전화를 돌리고 촬영 세팅을 하며 실무를 쳐내고 있었죠. 프로그램에 필요한 사례자를 찾기 위해 온갖 커뮤니티와 게시판에 제 연락처를 남기며 구인 공고를 올리는 것도 제 몫이었습니다.
그렇게 치열했던 다큐멘터리 작업이 끝나고 1년쯤 지났을까요?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스팸인 줄 알고 넘겼을 텐데, 070이 아닌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라 무심코 통화 버튼을 눌렀죠.
00기업 팀장 "아, 혹시 예전에 그린 에너지 다큐멘터리 작업하셨던 작가님이신가요?"
나프리 작가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어디신가요?"
00기업 팀장 "안녕하세요. 저는 OO기업에서 10년 뒤 미래 관련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팀입니다. 수소 에너지에 대해 잘 아시는 작가님을 찾고 있었는데, 예전에 올리신 구인 공고에 남아 있는 연락처를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곤 생각했죠. '이거 사긴가?'
나프리 작가 "아~ 네. 그런데 저는 당시 서브 작가로 일해서 방금 말씀하신 구인 공고처럼 사례자 찾고 자료 조사하는 업무를 주로 했거든요. 전체 원고는 메인 작가님이 쓰셔서, 원하시면 메인 작가님과 연결해 드릴게요."
주제 파악을 너무 잘했던(?) 저는 메인 작가님을 연결해 주겠다는 말로 통화를 훈훈하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그렇게 끝난 줄 알았죠.
그런데 며칠 뒤, 그 팀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저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겁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자는 심정으로 명함을 받고 결국 본사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경험치가 부족했던 쪼렙 작가 시절이라 미팅 자리에 나가는 것조차 심장이 튀어나올 듯 떨렸습니다. 막상 자리에 앉으니 담당자분들은 온갖 전문 용어를 섞어가며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속으로 진땀을 뻘뻘 흘렸죠. '아니, 제가 미래학자도 아닌데 저한테 미래 모빌리티를 물으시면....'
그런데 참 신기하죠? 방송 작가로 구르다 보면 얄팍하게나마 주워듣는 잡지식이 꽤 쏠쏠하게 쌓이거든요. 게다가 평소 주식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미래 기술을 주도하는 기업들의 행보에 흥미를 느끼고 틈틈이 들여다보던 터라, 10년 뒤의 세상을 상상하는 대화가 의외로 핑퐁 치듯 재미있게 흘러갔습니다.
결국 그 미팅 끝에 저는 비밀유지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무려 대기업 프로젝트의 '상상력' 파트를 맡아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계약상 자세히 이야기할 순 없지만, '세상에, 이렇게도 인연이 닿아서 일을 하게 되는구나' 싶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영화 <역린>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중용 23장의 구절이죠.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1년 전, 절박한 심정으로 한 명이라도 보길 바라는 마음에 정성껏 올린 구인 공고, 그 작은 노동이 1년 뒤 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준 동아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우리가 하는 일 중에 하찮은 일은 없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작고 평범한 일에 지극한 정성을 다할 때, 그 진심은 기어코 겉으로 배어 나와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결국 내 인생의 다음 챕터를 열어주는 열쇠가 됩니다.
매일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모니터 앞을 지키는 직장인, 아이 챙기랴 일하랴 종종걸음 치는 워킹맘, 매일 티 나지 않는 집안일로 가족의 일상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주부, 졸음과 싸우며 문제집을 넘기는 학생, 그리고 정성스레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시는 할머니까지.
누구의 자리든, 우리가 매일 묵묵히 반복하는 그 사소하고도 위대한 노동은 결코 헛되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켜켜이 쌓인 그 시간들은 언젠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가장 놀라운 인연과 기회로 돌아올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도 묵묵히 자신만의 하루를 살아내는 세상의 모든 분들. 오늘도 참 고생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빚어내고 있는 그 '작은 정성'의 힘을 굳게 믿어보자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