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의 또 다른 먹거리 ‘입찰 제안서’

chapter3 [특송] 까다로운 고객을 위한 맞춤 배송

by 나프리

매년 11월이 오고 찬바람이 창틀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방송 작가의 책상 위에는 대본 대신 다른 흰 종이 뭉치들이 쌓입니다. 바로 ‘입찰 제안서’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비즈니스 서류겠지만, 그 문장들을 벼리고 있는 작가에게 그것은 서늘하고도 묵직한 삶의 무게입니다. 왜냐하면 제작사의 1년 치 ‘먹거리’가 그 종이들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죠.


작가 개인에게도 그것은 단순히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내년 한 해 동안 내가 서 있을 무대를 스스로 짓는 일입니다. 내가 쓴 문장이 통과되어야만 동료들의 월급이 입금되고, 텅 빈 사무실의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여러 명의 생계가 온전히 내 책임은 아니지만 내 손끝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감각은 매번 낯설고 무겁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여러 해 일하다보니 그 고요하고 치열한 기록의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몇 가지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첫째로, 문장 너머의 목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공고문에 적힌 ‘홍보’나 ‘확산’ 같은 단어들은 대개 딱딱한 껍데기입니다. 작가는 그 이면에 숨은 결핍을 읽어내야 합니다. 가령 “문화유산을 알려야 한다”는 말 뒤에 숨은, “우리의 가치가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는 절박함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간절한 지점을 건드릴 때 비로소 문장은 힘을 얻습니다.

둘째로, 제안서의 순서는 지도가 아니라 드라마의 호흡을 닮아야 합니다. 왜 이 일이 시작되어야 했는지(기)부터, 지금 마주한 한계들(승)을 지나, 우리가 준비한 선명한 해결책(전)을 보여주고, 마침내 그 일을 마친 뒤에 마주할 변화된 풍경(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편의 이야기를 읽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서사가 필요합니다.

셋째로, 이미지로 연상되게 글을 쓰는 것입니다. 심사위원의 눈은 활자에 지쳐 있습니다. 빽빽한 설명 대신, “자전거를 타고 유산의 숨결을 따라가는 길”이나 “한옥 목수의 망치질 소리를 담은 정갈한 영상”처럼, 읽는 이의 머릿속에 즉각적인 그림이 그려지게 써야 합니다. 좋은 글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단호한 한 줄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모든 기교를 걷어내고 남는 것은 대상을 향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노고를 이토록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라는 진심 어린 문장 하나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50~100쪽 사이로 작성되는 제안서

올해도 여러 개의 제안서를 작업했습니다. 제안서를 쓰기 전 내가 적어 내려가는 문장 하나가 누군가의 식탁 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이 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되새겨 봅니다. 그리고 비즈니스라는 차가운 수면 위로 동료들과 함께 건너갈 징검다리를 놓는 심정으로, 식어가는 커피의 온기를 빌려 마지막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 일이 타인의 생을 지탱하고 있다는 감각은 때로 어깨를 짓누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함께 무사히 다음 계절로 건너왔다는 사실이 다시금 펜을 잡게 하는 다정한 힘이 되기도 하더군요. 서로의 내일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담긴 이 마침표들이 좋은 결실로 맺어지길 바랍니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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