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이백열세번째 밤. 내 편
부끄러운 고백을 한 가지 하자면
지난 글, 그러니까 브런치 첫 글을 올리고 나서 나는 혼자 안과를 찾았다.
어떤 검사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도치를 데리고 어떤 검사까지 수행할 수 있을지, 또 검사를 위해서 도치가 어느 정도까지 협조를 해 주어야 할지 궁금했던 탓이다.
생각해보니, 단지 궁금했던 탓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조악한 변명이다.
검사를 거부하며 무서워할 도치의 모습이 그려져 미리 걱정스러웠고, 그런 도치를 어르고 달래며 쩔쩔맬 내 모습도 걱정스러웠다. 그럼에도 마냥 검사를 미루기에는 하루빨리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고, 어떤 조치든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은 나의 못난 조급함이 나를 안과로 이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검사는 내가 하기에도 어려웠다. 적어도 초등학생 정도는 되어야 진행이 가능할 것 같아 나는 다시 초조해졌다. 도치라면, 어쩌면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는 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조급함이 다 드러난 탓일까. 의사 선생님은 나를 달래듯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다.
‘아직은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데려오시면 가능한 검사만이라도 해서 다른 안과 질환이 있는지 살펴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현재 개월 수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아버님이 관찰하시기에 보이는 모습이 질환에 의한 것인지 다른 이유인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의사 선생님의 배려 덕에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괜찮아, 정해진 것도 없고, 교정하면 되고, 수술하면 되고... 그리고 다 살아져.’
다 살아진다.
유난히 호들갑을 떨어대는 내가 내가 불안을 견디기 위해 외우는 주문과도 같은 말이었다.
살아있으면 다 살아진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효력은 매우 짧다.
그러면 더 자주 외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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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은 따로 있다.
몇 가지의 검사를 받는 짧은 사이에 브런치 앱 알람이 와 있던 것이다.
내 기분도 덩달아 환기되는 예상치 못한 좋은 경험이었다.
누구에게는 단순한 터치 한 번이겠지만, 처음 받아든 몇 개의 ‘라이킷’에 어떻게 반응을 하는 게 브런치 문화일지 생각해보는 소소한 고민도 나쁘지 않았다. 온라인 공간에 생각을 적은 일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일기에 가까운 넋두리를, 공들여 써서 공개된 공간에 건 것은 처음이었고, 누군가 내 독백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묘한 경험이었다. 나도 가서 마찬가지로 라이킷을 눌러야 하나? 싶은 마음에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곧 ‘라이킷’이 아닌 하나의 댓글이 올라왔다.
첫 댓글이었다.
두 번째 글이 늦어진 것은 그 댓글이 내 마음에 던진 파문을 바라보고 글로써 표현하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에 의해 진행된 사회 실험이 있다.
얼마 전 읽었던 ‘프레임’에서 소개된 실험이다.
- 8명의 학생이 실험에 참여한다. 이 중 1명은 피험자고, 7명은 실험의 동조자이다.
- 피험자는 이 사실을 모른다.
- 8명의 학생은 같은 길이의 선분을 찾는 쉬운 과제를 해결한다.
- 그런데 각본에 의해, 7명의 동조자들은 2회차까지는 정답을 선택하고 세 번째 회차부터 일부러 오답을 정답으로 선택한다. 정답이 2번임에도 7명은 1번을 선택하는 것이다.
- 좌석 배치상 피험자는 마지막에 앉아 7명의 동조자가 나란히 오답을 선택하는 것을 보게 된다.
- 이런 식으로 피험자를 제외한 집단 전체가 고의로 동일한 오답을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 피험자의 정답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아본다.
어쩌면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처럼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엉뚱한 답을 내놓는 실험이다. 매우 쉬운 난이도의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회차가 거듭될수록 정답률은 60%에 가깝게 감소한다. 실험을 반복한 결과 무려 75%의 피험자가 적어도 한 번은 다수를 따라 오답을 선택했다.
다수의 사람들은 가끔씩 자신의 소신보다 다수의 의견을 따라간다는 것을 보여주며, 상황의 위력을 시사하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이 실험이 가지는 의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 변형된 실험에서는 7명의 동조자 중 한 명으로 하여금 집단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정답을 고르도록 한다. 즉, 피험자에게 ‘자기편’을 만들어준다. 그러자 정답률은 다시 100%에 가깝게 돌아왔다.
- 놀라운 점은 동조자 중 한 명이, 정답이 아니라 집단과는 다른 엉뚱한 오답을 선택해도 피험자의 정답률이 100%에 가깝게 돌아온 것이다.
내 아이에게 내가 그 한 명이 되어주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삶이라는 문제에서, 어떤 답을 내놓아야 아이가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프레임'을 읽고 한 동안 떠나지 않던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댓글에서 답을 얻었다. 댓글을 읽으며 나의 소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한 사람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위로를 받는다.
용기내 이야기를 꺼내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나는 다짐하듯 입버릇처럼 말했다.
‘우리 아이가 행복하기만 하면 무슨 일을 해도, 어떻게 살아도 좋다’고
가끔 나를 돌아볼수록 나는 정말 대책없는 철부지였다. 언젠가 지금의 나도 그리 되겠지만...
우리 아이가 행복하기만 하면 무슨 일을 해도, 어떻게 살아도 좋다.
하지만, 아이가 최소한 건강하기는 했으면 좋겠다. 최소한 예의는 발랐으면 좋겠고, 최소한 친구들은 두 세 명은 있었으면 좋겠고, 최소한 사회 법규는 지켰으면 좋겠고, 최소한 부모와 말은 통했으면 좋겠고, 최소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고, 최소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쁜 평은 안 들었으면 좋겠고, 최소한 행색이 남루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최소한...
최소한... 수많은 최소한이 내 안에 있었다.
단지 공부나, 직업이나, 수입에 조금 관대할 뿐 온갖일에 내 나름의 하한선을 정해놓고서는 '아이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니. 그 행복이란 내가 생각한 아이의 행복이지 아이가 느끼는 아이의 행복이 아닌 것이다.
도치의 눈을 보고 내가 지레 초조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도치가 눈이 불편하면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남들에게 흠잡힐만한 일은 없었으면 좋겠으니까. 도치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도치가 영영 발달을 못 따라잡으면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짓고 두려워했고,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도치의 발달을 걱정하며 긴 터널을 터벅터벅 지나는 동안 느낀 점이 있다면, 만약 도치가 느리지 않았다면 어느 시점부터 분명히 나는 도치를 숨막히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다르다. 아이에게 안맞는 공부를 억지로 시키고, 아이의 직업을 골라주려는 부모와는 다르다. 다만 이건 아이가 행복해지기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과정이다.' 이렇게 되뇌이며 나의 그 '최소한'에만 맞춰달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아이를 쪼았을 것 같다.
도치는 발달이 느리고, 영원히 느릴 수도 있고... 불안하고, 예민한 아이이다. 언젠가 해프닝처럼 회상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현실인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이런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어쩌면 내 아이가 사회에서 조금 별난 아이일 수도 있겠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해내는 것을 도저히 못하는 아이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 사이에 섞어놓으면 너무 두드러지게 모나거나, 부족한 면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성미가 괴팍하거나, 요란한 아이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주변에 친구하나 없을 수도 있겠다. 또...
그러다보면 문득 불안해진다.
아이가 자기 삶이 오답이라고 생각하게 될까봐. 또는, 자기 삶에 대해 판단할 능력도 갖추지 못할까봐. 그래서 아이에게 세상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선택지를 한 가지 쯤은 보여주고 싶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지켜낼 수 있도록. 아이가 알아보려면 나부터 지금부터 많이 내려놓고, 노력하고, 연습해야겠지.
너가 힘들다면 꼭 그렇게 어울려 지내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과 살갑게 지내지 않아도 돼. 별난 구석이 있어도 돼. 남들이 보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해도 돼. 조금 한심해 보여도 돼. 남들 보기에 이상하게 말하고, 이상하게 입고 다녀도 돼.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 당해도 돼. 다른 부분이 잘 나서가 아니라, 그냥 그래도 돼. 너가 그게 맞다고 느끼면 그렇게 해도 돼. 도망쳐도 돼. 아빠도 그래. 아빠도 모자라고 부족해. 별 거 아닌 일에도 불안하고 늘 유난해. 너보다 한참 나이 먹었는데도 그래. 그래도 다 살아져. 그냥 너가 행복하면 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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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5월 2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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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 이제막 걸음을 떼는 나에게, 따뜻한 내 편 첫 한 사람이 되어주신 그 분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