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 되었다. 어제도 비가 내렸고, 오늘도 비가 내릴 것이며, 내일도 비가 내린다 했다. 그것도 미친 듯이 퍼부을 것이라 했다. 우리 집 성질 더러운 고양이는 베란다 창가에 앉아 비가 내리는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눅눅했지만, 마음은 산뜻했다.
내 회색 고양이는 여름이 되자 약간 갈색을 띄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아닌 아주 작은 부위에서만 갈색 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앞발의 옆면 일부나, 꼬리 옆 털, 목 아래 가슴의 역삼각형 부분 정도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변화였다. 아무래도 러시안 블루가 아닌 다른 종이 중간에 섞인 모양이었다. 남들이 알아채기 힘든 내 아이만의 사소한 특징들을 발견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기쁜 일이었다. 나는 내 아이를 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애정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바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애정의 형태였다. 녀석이 자동급식기를 박살 내놓아도, 퇴근하고 집에 와 보니 쓰레기통이 죄다 헤집어져 있어도, 시도 때도 없이 내 손과 발을 물어도 나는 녀석을 사랑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녀석을 녀석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고를 칠 때면 당연히 짜증이나 화가 나지만, 그게 녀석에 대한 애정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그에 반해 연인 간의 애정은 좀 더 동등한 관계다. 우린 연인을 연인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힘들다. 사고를 치거나, 나쁜 모습을 보이거나, 나에게 주는 애정이 부족하면 자연히 내가 주는 애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마디로 부모의 사랑은 곧 호구가 되는 것이지만 연인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랑하고 애정을 아낌없이 주되 호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연인 관계에서 더 좋아한다는 것은 빚을 진 것과 같다. 채권자보다 항상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채무자처럼, 더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이자로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위 밀당이라는 것을 통해 더 나은 위치에 서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너무 냉혹한가? 나는 다른 관계들보다 더 냉정한 논리가 작용하는 게 바로 연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채무자가 아니라 채권자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더 좋아해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항상 상대보다 덜 좋아하는 척 밀당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나 자신을 갑으로 만들어 내 몫을 챙겨야 하는 걸까? 그런 인생은 너무 허망하고 고달프지 않을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내가 바라는 연인 관계가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널린 수많은 채권자들이 아닌 사람. 내가 더 좋아해 줄 때 더 많은 이자를 요구하는 게 아닌, 자기 스스로를 채무자로 만들어주는 사람. 그래서 양쪽 모두가 채무자가 되어, 서로에게 진심과 헌신을 다하는 관계로 만들어주는 사람. 그렇게 서로를 향한 애정의 형태를 무조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