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보지 않는 웃음
매달 마지막 주가 되면
한 달 동안 아이들 수업을 하며 찍어 둔 사진들을 정리한다.
아이 이름별로 폴더를 나누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부모님께 보낼 사진을 고른다.
이 작업을 할 때마다 이상한 순간이 찾아온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자기 작업에 집중한 채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웃고 있는 표정을 마주할 때,
이유 없이 울컥해진다.
기쁘다기보다는, 가슴 한가운데가 잠깐 멈춘다.
왜 그럴까.
아이들이 웃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결과물이 좋아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웃고 있지도 않다.
그저 자기 손에 쥔 연필이나 붓,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다.
그 표정에는
“괜찮다”라는 감각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자기가 여기 있어도 된다는 느낌.
아마 내가 울컥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가 안전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미술을 가르치지만
사실 미술을 잘 그리게 하는 게 목표는 아니다.
더 빠른 방법, 더 효율적인 방식,
더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드는 길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일부러 선택하지 않을 때가 많다.
아이들이 막히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 멈춰 서 있을 때
나는 종종 기다린다.
도와줄 수 있지만, 바로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 불편한 시간을 아이가 직접 통과해 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게 교육적으로 맞는 선택인지,
사업적으로 옳은 선택인지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가끔은 더 빠른 길을 택하지 않는 내가
괜히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닐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진 속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질문들이 잠시 멈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내 선택이 이 아이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구나.”
그 확인이
이상하게도 기쁨보다는
안도에 가깝게 찾아온다.
그래서 눈물이 맺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아이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수업을 정확히 떠올리지 못해도 상관없다.
다만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
설명할 수는 없어도
‘무언가에 몰입해도 괜찮았던 시간’이
몸 어딘가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매달 사진을 정리하는 이 시간은
학부모에게 보내는 업무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아직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다”는
작은 확인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눈물이 나는 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아직 사람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라 믿고 싶다.
그래서 다음 달에도
나는 또 사진을 정리할 것이다.
아이 이름이 적힌 폴더를 하나씩 열어보며
조용히, 같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