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이제는 보내줄게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기억은 있습니다.
그 기억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할 뿐이지만. 만일 그 기억을 조금만 바꿀 수 있다며, 내 마음은 한결 편안해질 겁니다.
현실적으로 지나간 과거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내 기억을 약간 뒤집어 방향을 틀어 놓을 수 있다면, 당신은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공간으로 한 걸음만 들어오세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들려 힘들게 눈을 떴다.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의 형체가 보이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맴돌았다. 사무적이고 차가운 여자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환자분, 환자분, 링거 다 맞았어요. 어지러우면 조금 더 누워계시다가 나오세요.
팔에서 바늘을 빼는 게 보였다. 우진은 몸을 일으키려고 허리에 힘을 주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다시 귀가 먹먹하였다. 팔에 힘을 집결하듯 짧은 신음을 내며, 오른손으로 벽을 밀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김소장이 골골되는 거 보기 싫다고, 병원 가서 영양제 맞고 오라고.’ 이제야 생각이 났다. 회사 근처 내과에 왔었다. 우진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에 한기가 느껴져 조금 더 누웠다 갈까 생각을 했다. 벽에 붙은 시계를 보니 7시 10분이었다. 복도 쪽에서는 간호사들이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문 앞 붙어있던 진료시간 안내에서 7시까지라고 본 것 같아서, 서둘러 병원 문을 열고 나왔다.
1층 약국으로 가서 처방전을 내밀었다. 60대로 보이는 대머리 약사가 약봉지를 꺼내 보이며, 알약에 대해 하나씩 설명하였다.
-노란 건 콧물 멈추는 거고요, 하얀 건 몸살이고, 여기 하얀 건 위장약이에요. 이 캡슐은 기침약입니다. 하루 3번 식사하시고, 드시면 됩니다. 되도록 따뜻한 물 많이 마시고, 쉬어 주세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군요.
우진은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어 내밀었다.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사무실에는 동료들이 한참 마무리 작업 중 일 것이다. 중앙동에 건축 예정인 주상복합시설 설계도면 납품 때문에, 5일 동안 사무실에서 쪽잠 자며 모두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우진은 어제부터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기침과 콧물이 났다. 머리 위에 있는 시스템 에어컨을 끄고, 회사잠바를 입었다. 9월 말이지만,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동료들은 더워서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켜 놓고 있는데, 혼자 춥다며 에어컨을 꺼 놓아 눈치가 보였다. 지금 몸 상태로는 도저히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 무리였다. 아니 오히려 다른 동료들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나름 퇴근에 대한 명분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지만, 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번 김소장에게 문자를 쓰다가 지워버렸다. 궁색한 변명을 하느니, 내일 아침에 시원하게 욕 한번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우울한 비가 소리 없이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감기에 비까지 맞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존 본능에 바로 옆 편의점에서 비닐우산을 사서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버스도착 알림판에서 40번 버스 도착시간을 찾아보았다. 대기시간 8분을 확인하고, 140번 버스 도착시간을 찾아보았다. 6분 후 도착이었다. 40번 버스는 4개 정류장을 거치면, 우진이 사는 동네까지 바로 간다. 140번 버스는 한참 돌아서 가지만,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오면 이 버스를 타곤 하였다. 140번 버스는 헤어진 여자친구가 살던 동네를 거쳐, 우진이 사는 동네까지 간다. 미국으로 유학 간 그녀가 살았던, 서로의 추억이 짙게 배어있는 동네. 여자친구였던 이새봄은 봄 햇살처럼 항상 밝게 웃고 다녔다. 조용하고 숫기가 없던 우진을 유일하게 웃게 하는 존재였다. 두 사람이 다니던 회사는 가까웠다. 퇴근할 때면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집에 데려다주곤 하였다. 헤어지기 싫어 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였다. 헤어진 지 9개월이 넘었지만, 돌아서면 바로 뒤에 있을 것 같아 우진은 버스정류장에서는 앞만 보고 서 있었다. 버스에 올라탄 우진은 맨 앞자리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만원인 버스는 곧 시내 중심가에 사람들을 쏟아내었다. 한가해진 버스는 몇 정거장을 거쳐 그녀가 살았던 동네에 우진을 내려놓았다. 빗줄기는 좀 더 강해져 우진의 우산을 두드렸다.
두께감이 있어 보이는 잠바를 입고, 비틀거리듯 천천히 걷는 우진을 사람들은 빠르게 피해 지나갔다. 우진은 무심결에 그녀의 집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다이어트 포기하던 날에만 갔던 곱창집, 기력회복시켜야 한다며 데려간 곰탕집 간판이 보였다. 길 건너 맞은편에는 두 사람이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던 커피전문점도 보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녀만 여기에 없었다. 우진은 급하게 뒤돌아서 반대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뒤에서 걸어오던 여고생 2명과 부딪칠 뻔하였다. 급하게 옆으로 피하다 보니 우산이 가로수에 부딪쳐 반쯤 부서져버렸다. 갑자기 우진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여고생들은 우진을 슬쩍 쳐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갔다. 우진은 눈물을 참으며 사람들이 없는 골목길로 방향을 잡았다. 정처 없이 이 골목, 저 골목을 걷다 보니, 하나둘 동네 상점들의 불이 꺼졌다. 뒷목을 누르는 피로감은 내리는 비와 함께 우진을 낭떠러지로 밀어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서둘러 걷기 시작하였다.
익숙한 골목어귀가 보였다. 어두운 골목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옅은 노란색 간판 불빛이 보였다. 우진의 기억 속에 없는 상점이었다. 한자로 뭐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글자는 모르겠고, 나머지 세 글자만 읽을 수 있었다. ‘화세계’ 라며 속으로 되뇌었다. 꽃집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점 앞에 지나며 쳐다보니, 조그맣게 한글로 ‘연화세계’라고 적혀 있었다. 고풍스러운 한옥 처마는 우진에게 강해진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었다. 상점 진열창으로 보이는 내부는 포근한 분위기였다. 무슨 가게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검색을 해 보았다.
‘연화세계(蓮花世界)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극락정토(極樂淨土)가 있는 세계(世界). 지극(至極) 히 안락(安樂)하고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는 곳.’
몇 번을 읽어보았지만, 무슨 상점인지 추측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카페? 전통찻집? 아니면 점집? 다시 진열창을 쳐다보았다. 진열창 선반에는 푸르스럼한 하늘빛이 감도는 도자기 형태의 찻 주전자와 찻잔이 보였다. 옆에는 나무 재질의 둥그런 통이 보였고, 거기에는 마른 찻잎이 보이게 덮개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상점 내부에는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 2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중앙에 육각형 등불형태의 큰 샹들리에가 노란 백열등색의 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우진은 잠시 망설였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차를 마시고, 혼자 영화를 보며 싱글족의 삶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처음 보는 상점에 들어갈 때는 쭈빗쭈빗 해졌다.
상점의 출입문은 반자동문으로 문 가운데 버튼이 보였다. 투명한 유리문의 안쪽면에는 한옥 여닫이문에서 볼 수 있는 격자무늬가 멋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대화를 나누던 점원이 우진을 보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중 제일 어려 보이는 점원이 다가왔다.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시나요?
점원은 우진과 눈을 맞추었다. 우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점원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안쪽 진열대로 이끌었다.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차(tea)가 보였다. 점원은 진열장에서 손바닥 크기의 종이상자 2개를 꺼내어 보였다. 일반적으로 녹차를 많이 찾는다며, 보성녹차와 안동녹차를 보여주었다. 우진은 비도 잠시 피하고,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어서 들어왔다. 녹차에 관한 설명이 끝났지만, 우진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녹차상자만 쳐다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길어질 찰나 우진은 질문할 것이 생각났다.
-차의 재료는 식물의 잎만 사용하나요?
우진의 질문에 점원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의 큰 종류에 대해 설명하였다. 식물의 뿌리를 이용하는 차, 곡물과 견과로 만든 차, 식물의 잎으로 만든 차, 꽃으로 만든 차에 대해 하나씩 설명하였다. 설명을 듣다 보니, 헤어진 여자친구가 선물해 주었던 차가 생각났다. 싱가포르에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오면서, 커피 마시는 것 줄여야 한다며 차를 사 왔다. 우진은 1년도 더 지난 그 차 맛에 대해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다. 점원은 우진에게 소파 쪽을 가리키며, 앉아서 시음을 해 보겠냐며 물었다. 너무 걸어서인지, 감기몸살 때문인지 모를 피곤함과 허기짐에 우진은 쓰러지듯 소파에 안겨버렸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다기세트가 놓여 있었다. 점원은 안동녹차를 보여 주며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우진은 코 끝에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그냥 풀냄새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예의상 좋다고 말했다. 점원은 끓는 물이 담겨 있던 탕관(뜨거운 물이 담은 주전자)에서 숙우(볼타입의 그릇) 물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숙우로 물을 옮겨 부었다. 조심스럽게 차수건을 이용하여 왼손으로 숙우의 밑받침을 받쳐 들었다. 이어서 안정적으로 숙우를 받쳐 들어 찻잔에 물을 부었다. 점원의 동작에는 절도와 부드러움이 함께 배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경건해지는 분위기였다. 따뜻해진 숙우와 찻잔의 물을 퇴수기 그릇에 부었다. 차시(작은 차 숟가락)를 이용하여 녹차 두 스푼을 탕관에 넣었다. 새롭게 받은 숙우의 물을 천천히 탕관에 부었다. 3분 정도 지난 후, 찻잔에 녹차를 따라 주었다. 우진은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셔 보았다. 따뜻한 찻물이 기도를 통해 내려가는 것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가, 남은 녹차를 천천히 마셨다. 혀끝에 단맛이 맴돌았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우진은 점원에게 느낌을 설명했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진의 마음속에 얼어있던 말들이 녹으면서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여자친구가 선물해 준 차의 향과 맛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우진은 점원에게 그 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찻물의 색은 밝은 노란색이었어요. 끓는 물을 부으면 달콤한 꽃 향기가 느껴졌던 것 같아요. 우진은 빛바랜 기억에 덧칠하듯 차에 대해 천천히 읊조리며 말하였다.
-처음에는 단맛이 느껴졌어요. 조금 전 마신 녹차에서 느꼈던 단맛과 다른 느낌이에요. 과일에서 느껴지는 단맛이라고 할까. 꼭 복숭아 주스를 마실 때 느껴지는 단맛이었어요. 그리고 거기에 꽃에서 느껴지는 향긋함도 좋았던 것 같아요.
장황하게 말을 하고 보니, 왜곡된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민망함을 느꼈다. 점원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을 하고 다른 점원에게 가서 무언가를 이야기하였다.
우진은 상점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 못 보았던 것들이 보였다. 상점은 밖에서 보는 것에 비해 작았다. 가로와 세로가 8미터가 안되어 보였다. 우진이 앉은 소파와 테이블을 제외하면 유리 진열장 3개가 전부였다. 진열장에 들어있는 차 들이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한쪽 벽면에 간접등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기세트가 5개가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었다. 대체로 도자기 재질에 붉은색과 노란색이 어울려져 있어 제법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내부를 둘러보던 우진은 지갑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해 놓고, 안 사면 체면이 구겨질 것 같았다. 새봄이 선물을 주며, 싱가포르에서 산 물건 중 제일 비싼 거라고 강조하던 것이 생각났다. 이런 생각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밀고 들어오자, 우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파 앞단에 엉덩이만 걸치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조금 전까지 우진의 앞에서 이야기하던 점원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이 좁은 공간에서 이동한 것도 못 보다니, 약간 홀린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다기세트가 진열되어 있는 벽의 모서리부근에서 문이 열렸다. 천정에서 내려오는 간접등에 의해 문의 존재가 가려져 있었다. 누군가 문을 열지 않으면 거기에 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벽과 문이 구분되지 않았다. 점원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손님이 말씀하신 차는 여러 가지 재료가 블렌딩 된 제품인 것 같습니다. 저희 티 마스터가 직접 블렌딩을 해서 찾고 계신 차와 같은 향과 맛을 내어드릴까 합니다.
우진은 기성제품이 아니고 블렌딩을 한다면, 가격이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여유를 찾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점원에게 대답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어떡하죠,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다시 올게요. 집이 근처니깐 퇴근길에 들릴게요.’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점원에게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어떡하죠, 저기, 제가…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주먹만 한 얼굴에 큰 눈망울을 가진 점원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점원의 따스한 미소는 우진을 안심시켰다.
-네 좋습니다. 기대되네요.
우진은 조금 전 자신을 둘러싼 걱정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점원은 벽과 문이 잘 구분되지 않는 비밀스러운 문을 열고, 우진에게 눈짓을 보냈다. 문을 통해 들어간 내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한쪽 벽에는 말린 꽃과 잎을 종류별로 모아 놓은 유리병이 보였다. 대충 보아도 50개는 넘어 보였다. 반대편 벽에는 사진이 보였다. 차밭에서 차를 수확하고 있는 모습이 담긴 여러 장의 흑백사진이 묘하게 같은 장소, 다른 연도(年度)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듯했다. 흑백사진과 대조되는 컬러사진에는 좁은 툇마루에 가지런히 꽃봉오리를 펼치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엔틱 한 원형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쪽의 벽에는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각기 다른 얼굴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웃고 있었다. 아주 편하고, 마음에 근심은 하나 없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내실 가운데 오래된 원목으로 된 직사각형 테이블이 있었다. 거기에는 다양한 차 재료들이 조그마한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도자기 소재의 믹싱볼 그릇이 몇 개 보였다. 한쪽에는 다기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우진이 들어간 문과 반대쪽 방향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차분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여자는 다가오며 우진에게 손짓으로 원형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우진은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보기보다 편한 느낌이어서, 엉덩이를 의자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저는 연화세계 티 마스터 황인숙입니다. 찾고 계신 차가 있다고 들어서 제가 도와드릴까 합니다.
우진은 인숙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뒷목을 살짝 덮는 단정한 단발머리. 거기에 흰 머리카락과 검은 머리카락은 3:7 정도의 비율로 아주 기품 있어 보였다. 머리색만 보면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얼굴 피부는 주름살 없이 아주 탄력 있고, 매끈해 보였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흰머리를 보면 50대, 피부는 30대. 인숙은 우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쪽으로 와서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했다.
-이 차는 구기자차인데 해열에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간의 해독능력을 도와주죠. 드셔보세요.
우진은 해열이라는 말에 미열로 인한 홍조 띤 자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보일 것이고, 비를 약간 맞았으니 머리카락도 쳐져 보일 것이다. 거기다 얼굴에 홍조까지. 슬그머니 손을 들어 머리를 정리했다. 구기자차를 다 마시고 나자,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만났지만, 낯설지 않은 인숙은 우진에게 몇 가지 차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궁금하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인숙의 말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는 듯 줄곧 인숙만 빤히 쳐다보았다. 어린아이가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에 집중하듯.
우진은 인숙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차의 향과 맛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숙은 우진의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던 향과 맛에 대해 어떤 차의 재료들이 부합하는지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간혹 웃기도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앞뒤로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는 차에 대한 내용부터 최근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 범위를 넓혀갔다. 우진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 어느새 이야기는 우진만이 하고 있었다.
-이 동네에 오면 마음이 편해져요. 사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살았던 곳이라 자주 오기도 했고요. 최근에는 바빠서 못 왔지만, 그래도 여기 이런 좋은 가게가 생긴 건 몰랐네요.
우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순간 눈앞이 뿌해졌다. 새봄이와 여기 같이 왔다면, 마음에 들어 했을 텐데..... 밑바닥까지 내려놓은 그리움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우진은 급하게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인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각 티슈를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중앙에 놓여진 큰 직사각형 원목 테이블로 다가갔다.
몇 개의 유리병에서 차시로 재료를 꺼내어 도자기로 된 믹싱볼에 담았다. 그리고 작은 서랍이 여러 개 달린 엔틱한 서랍장에서 마른 잎을 가져와 믹싱볼에 담았다. 테이블 구석에 호리병처럼 생긴 아기자기한 작은 유리병을 가져와 긴 스포이드를 사용하여 유리병 액체 두 방울 믹싱볼에 떨어 뜨렸다. 인숙은 그렇게 블렌딩한 차 재료를 다관에 넣었다. 끓는 물이 담긴 탕관을 들어 숙우에 물을 부었다. 두 손으로 숙우를 받쳐 들고, 천천히 다관에 물을 부었다. 5분 정도 흐른 뒤, 찻잔에 차를 부어서 우진에게 내어주었다. 우진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찻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가 향을 먼저 맡아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그윽하고 상큼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다시 한번 입으로 가져가 조금 더 마셨다. 입안 가득 향긋한 장미향이 느껴지고,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환한 빛이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진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어요. 겁내지 말고
방향을 알 수 없는 말소리가 울리듯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숙의 소리였다. 우진은 동그란 고리형태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무언가를 안내하는 방송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캐리어를 끌고 우진의 옆을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우진은 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정면에 큰 전광판이 보이고, 끊임없이 비행기 이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여기가 어디지, 공항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진은 코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화면을 확인하였다. 12월 2일 일요일 11:29 이라는 화면이 보였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스마트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화면에 여자친구 새봄이 미국으로 유학 가는 날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우진이 공항에 나가 새봄이를 배웅하기 위해 달력에 미리 표시해 놓은 스케줄 알람이었다.
‘아니야, 난 이날 이 시간에 분명 친구들을 만나서 테니스를 치고 있었는데, 왜 내가 공항에 있는 거야.’
우진은 혼란스러운 듯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확인하고, 전광판 앞으로 걸었다. 전광판에서 뉴욕으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 편을 찾아보았다. 전광판에 표시된 항공 스케줄은 2시 정각에 인천에서 뉴욕으로 출발하는 대한항공편이 보였다. 우진은 출국장을 향해 젠걸음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새봄이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새봄이의 전화는 통화 중이었다. 우진은 출국장 게이트를 향해 뛰었다. 출국장 게이트가 4개나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첫 번째 게이트로 뛰어가,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앞으로 가 새봄을 찾아보았다. 그녀는 없었다. 우진은 두 번째 게이트에도 달려가 보았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 번째, 네 번째 게이트를 확인했지만, 그녀는 없었다. 우진은 네 번째 게이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때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진아, 김우진…
돌아서는 우진에게 그녀가 달려와 안겼다.
-안 나오는 줄 알았어. 정말 못 보는 줄 알았다고. 바보야.
울먹이며 그녀는 우진의 품에 더 깊게 파고들었다.
우진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한동안 서로를 안아주며 감정을 추슬렀다.
-잘 다녀와. 그리고 미안해, 내가 너무 못 된 말만 했지.
우진은 새봄의 등을 토닥였다.
새봄은 우진의 품에서 울기만 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해.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우진의 말에 새봄은 고개를 끄떡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장미와 히비스커스의 꽃향이 느껴지시나요.
인숙의 목소리에 우진은 눈을 떴다. 우진을 향해 살며시 미소 지어 보이며, 차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은은하고 차분한 향은 장미입니다. 상큼함과 혀 끝에서 느껴지는 깔끔함은 히비스커스가 주는 선물이고요. 거기에 로즈힙 허브향이 장미와 히비스커스 사이에서 둘 사이를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해 주고 있지요.
우진은 인숙에게 조금 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 상황이 꿈이면 어떠하고, 현실이며 어떠한가, 우진은 자신의 아픈 과거 기억을 다시 좋은 추억으로 바로 잡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왠지 모를 지금 이 시간을 더 즐기고 싶었다.
-장미의 꽃말은 정열이죠?
-네, 맞아요. 장미는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을 뜻해요.
인숙은 알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우진은 새봄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 웃으면서 보내줄 자신이 없어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그날 이후 자신의 옹졸함에 화가 났고, 새봄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겨워했다. 이제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커다란 감정의 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어서 다른 찻잔이 우진의 앞에 놓여졌다. 찻잔 속을 바라보았다. 여튼 초록색 찻물이 조금씩 출렁이듯 보였다. 인숙을 쳐다보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 향을 맡아보았다. 상큼하고 개운한 향이 느껴졌다.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었다. 청아한 꽃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눈앞에는 조금 전과 같은 문이 보였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마른 햇살이 호수 물결에 부딪쳐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눈부심에 찡그리듯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아주 큰 호수가 보이고, 호수 주변으로 낡은 갈색 벤치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 끝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큰 나무가 눈앞에 보였다. 그 나무 밑 벤치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하얀색 바탕에 노란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우진은 그녀가 앉은 벤치에서 다섯 걸음정도 떨어진 벤치에 앉아 그녀의 뒤에서 쳐다보았다.
-우진아, 우진아, 이리로 와.
젊은 여자는 작은 꼬마 아이를 바라보며 불렀다. 아이는 그녀에게 뛰어가 품에 안겼다.
-아들, 엄마가 많이 사랑해.
그녀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아이가 약간 바둥거리자 그녀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며 슬픈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엄마, 동화책 읽어줘.
아이는 벤치에 올려져 있던 동화책을 가리키며 말을 하였다. 그녀는 돼지 3형제가 그려진 동화책을 천천히 읽어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엄마, 울어, 왜, 울어?
아이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내려와 마주 보며 말을 하였다.
-아니야, 엄마, 안 울어, 그냥 우진이가 너무 좋아서…
그녀는 말을 얼버무렸다.
-우진아, 엄마랑 약속하나 해줄래.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우진이는 앞으로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밥도 잘 먹고, 씩씩하게 지내야 해.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다시 꼭 안았다.
우진이 5살 때 췌장암으로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낡은 사진첩이 닳아 없어지도록 보았던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어린 시절 엄마가 보고 싶으면, 이불속에서 몰래 그 사진을 꺼내어 보면서 엄마를 부르고는 하였다. 너무나 어린 시절 헤어진 엄마에 대한 기억은 우진에게는 없었다. 단지 사진으로 엄마를 기억해 내려할 뿐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사진은 엄마의 목소리, 향기, 따스함을 우진에게 들려주지는 못 하였다. 엄마를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나 엄마를 자신의 가슴속에 각인하고 싶었다.
우진은 그녀와 아이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엄마, 사랑해요.
우진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엄마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빠는 지방 이곳저곳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우진은 학교에서 가을 운동회를 하면 항상 외할머니밖에 오지 못 하여 아이들의 놀림을 받고는 하였다. 이제 우진의 가슴속에 엄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아닌 엄마의 사랑을 채워놓을 수 있게 되었다.
-목련 꽃의 깊은 향기와 개운하고 깔끔한 로즈마리 향이 느껴지셨나요.
인숙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혀 끝에 은은하게 감도는 목련 꽃향의 여운을 더 깊게 해 주도록 펜넬 허브향이 첨가되었어요.
인숙의 말대로 우진의 입안 가득 목련 꽃향이 깊게 느껴졌다.
-목련 꽃은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을 뜻해요.
인숙은 우진에게 엄마의 사랑을 알려주듯 천천히 설명을 하였다. 우진은 그런 인숙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했다. ‘엄마가 나이가 들었다면, 저 사람과 비슷하겠지.’
우진은 고개를 들어 인숙을 바라보았다. 인숙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잠시 우진에게 시간을 주었다. 우진의 얼굴은 다소 굳어있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에는 혼란스러움과 난감함이 나타났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게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이 안되네요.
-중요한 건 마음이에요. 자신의 마음속에 어두운 기억이 가득하면 그 기운은 결국 내 정신을 지배하게 되죠. 아픈 기억을 잊고 싶어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인숙은 우진 쪽으로 다가왔다.
-살면서 또 다른 감정의 벽에 직면하게 되겠죠. 하지만 우리는 그 벽을 넘어 계속 걸어가야 해요.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면 그 감정의 아픔은 봄바람에 날려가는 벚꽃잎처럼 흘려보낼 수 있어요.
우진은 자리에 일어서며 인숙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인숙은 문을 열어 매장으로 안내하였다. 우진은 매장에 서 있던 두 직원에게도 목례를 하고는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우진의 손에는 인숙이 블레딩한 차를 담은 작은 종이가방에 들려 있었다. 우진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일순간 골목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가게가 있던 자리는 골목벽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