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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단어를 읽고 싶어요

by Sia

"세희야, 세희는 영어공부하는데 어떤점을 잘 했으면 좋겠어? 어떤 부분이 제일 필요하니?"


"영어 단어를 읽고 싶어요."


세희의 영어공부 목표는 많은 영단어 암기가 아니었다. 세희가 원하는 영어공부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엉터리 수업을 죽어라 열심히 했을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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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희는 흔히 영어 파닉스 학습이 이뤄지지 않은채로 중학교에 올라온 학생중의 한 명이다. 그동안 중학교 영어수업을 들으면서 세희도 엄청 답답했다고 한다. 도대체 읽을수도 없는 단어의 뜻을 어떻게 외우며, 스펠링은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 건지.


작년에 같이 방과후 수업을 했던 재영이의 말이 귀에 맴돈다.

"선생님, 저는요 apple을 [에이, 피, 피, 엘, 이] 이렇게 외우지 않아요. 단어가 생긴 모양으로 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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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이의 말이 그 순간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어렵게 단어를 외울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영어단어 외우는것이 너무 힘들고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재영이가 그동안 영어공부 때문에 힘들어 한 이유가 영어 발음과 스펠링을 매칭시키지 못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어발음과 스펠링 매칭 학습은 중학교 영어교사가 가르쳐야 할 내용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영어를 배웠는데 그것 정도는 다 하고 와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때문에 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의 어려움을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 10여년간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도 세희처럼 "영어 단어를 읽고 싶어요!"라며 나에게 침묵의 아우성을 질렀던 아이들이 아주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동안 이 학생들은 도대체 왜 영어단어 외우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고, 하지 않는 것일까라고만 생각하며 학생들의 게으름을 탓하기만 했다. 그들도 영어공부를 진정으로 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영어 단어를 읽고 싶다는 세희에게 영어 발음과 그에 대응하는 스펠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영어 단어를 못 읽는 학생들은 반드시 파닉스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파닉스교육은 초등이전까지 유의미한 효과가 있고 중등이후부터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이 학계 연구 결과이다. 나 스스로도 파닉스 책을 보면 뭔가 외울건 많고 규칙은 없고 복잡하기만 하다. 그래서 난 영어발음기호를 사용하여 영어발음과 스펠링 수업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수업. 숙제도 없고 오로지 나와 공부하는 시간이 전부였기에 진도가 빠르게 나갈 수 없었다. 빠르게 나가지 않는 진도 때문에 나는 애가 타기만 했다.


"세희야, 우리 진도가 너무 안 나간다. 1학기 내내 이 발음기호만 공부하고 있어. 세희가 집에서 공부좀 하고 오면 좋을텐데, 세희는 그런 시간 못 내고. 참 답답하기만 하다. 세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저요? 음... 저는 그래도 이렇게 꾸준히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진도가 빠르게 나가지는 않지만, 조금씩 배우고 있는게 있으니까요."


선생님보다 더 어른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세희에게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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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기말고사 시험이 바로 다음주가 되었다. 세희에게도 기말고사 대비 공부를 시켜줘야 겠다는 욕심에 문장성분 찾기 연습을 했다. 수업시간에 계속 했던 내용이었고, 기말고사에도 비중이 큰 내용이었다. 하지만, 역시 세희에게는 너무 큰 점프였다.


"세희야, 문장의 주어 동사 목적어 찾는 것은 단어의 뜻을 아는 것보다 더 먼저 해야하는 일이야. 지금은 네가 알고 있는 영어 단어가 너무 없어서 더 힘든거야. 그러니까 영어 단어 좀 더 외우자!"


세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해줬을 것이다.

'선생님, 저는 지금 영어단어 외우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영어 단어 읽는게 더 중요해요.'


선생님의 마음이 너무 급하다. 아직 확실히 영어 단어를 읽지도 못하는 학생을 다그쳐서 영어 단어좀 외우라는 주문을 걸다니... 말을 끝내는 순간 '아차' 나의 잘못을 깨달았다. 하지만, 세희의 상황이 너무 답답했기에 미안하다는 말 조차 할 수 없었다.



1학기 기말고사 후 서술형 답안지 확인 시간

세희는 총 8문제 중에 2문제를 맞췄다. 보통 영어 기초가 없는 학생들은 서술형 답안지를 백지로 낸다. 하지만 세희는 2문제 답을 썼고, 그 2개가 다 맞았다. 20점 만점 중에 6점 밖에 안됐지만, 자신의 서술형 답안지 점수를 확인하는 세희의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마치 100점을 맞은 학생처럼.

"세희야, 서술형 진짜 잘 봤다! 푼거는 다 맞았어! 어떻게 했어?"

" 뭐 그냥... 그 단어들이 주어 동사 목적어 인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썼어요."


세희는 이제 조금씩 영어에 대한 감을 잡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합리하게 다그치는 교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력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학교 시험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1학년 영어는 이 수준까지해야 하고 2학년 영어는 이 수준까지 해야 한다는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이고 그 기준이 정당한 것일까? 지금 세희는 중학교 2학년이지만, 중2 영어 실력에 한참 뒤쳐진다. 하지만, 세희는 공부를 해가면서 자신이 뭔가 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의 기쁨을 맛보았다. 선생님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청사람들은 세희의 영어실력이 답답하기만 하고 한탄스럽지만, 정작 세희는 볼잘것 없는 실력일찌라도 뭔가 알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기만 했다.


어른이 맘대로 정한 기준에 못 이른다고 아이들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속도나 진도가 더디고 느리더라도 어제보다는 오늘 더 뭔가 알아가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아이와 함께 행복해 할 수 있는 지혜를 길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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