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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Jun 22. 2024

나의 개성, 한국어 개성으로 영어를 배운다

한국 영어교육한국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 식민의 영향으로 가장 큰 폐해를 끼친 것 중 하나는 바로 한국인들의 영어공부 방식이 아닐까 싶다. 일본지식인들은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많이 했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지식인들은 영어교육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독일어는 영어교육에 독이 되었다. 


독일어를 배운 후 배우는 영어는 매우 쉽다. 복잡한 독일어 문법을 간단하게 하면 영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식 영어는 이미 독일어를 배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방법이다. 이런 일본식 영어교육방식이 고스란히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었다. 


잘못된 역사로 인해 발생된 영어교육의 폐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한국어의 개성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독일어라는 다른 언어를 접하지 않고 한국어와 영어를 바로 이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은 우리나라 영어 번역의 역사를 짧게 살펴보면서 한국어의 개성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미국과 영국권에서는 외국어를 번역할 때 외국어를 영어적 정서에 가장 가깝게 번역(의역)을 한다고 한다. 

즉, 외국어를 곧이곧대로 직역을 하기보다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꿔서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한다. 영어를 번역할 때 한국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꾸기보다는 영어 원문에 있는 문자 그대로적인 표현으로 직역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번역 초창기에는 직역보다는 번역이 더 우세했다고 한다.

최남선은 영국 소설가 마리 루이사 라메가 쓴 플랜더스의 개 (A dog of Flanders)를 <불쌍한 동무>라는 제목으로 의역을 해서 번역했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네로를 ‘기남이’라고 했고, 네로의 개 파트라슈를 ‘바둑이’라고 한 것이다. 네로를 좋아하는 소녀 알로아는 ‘애경이’, 넬로와 파트라슈를 돌봐주는 노인 제앙 다스는 ‘조선달’이다.

네로와 기남이의 어감은 상당히 다르다. 어릴 적 보고 자라왔던 만화영화 파트라슈는 절대 바둑이가 아니다. 물론 네로와 기남이, 파트라슈와 바둑이가 서로 다르긴 하지만, 원서를 읽는 사람들이 '네로'라는 이름을 들을 때 느끼는 그 감정과, 한국사람들이 '기남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느끼는 그 감정은 비슷하다. 


의역의 좋은 점은 바로 이점이다. 한국어의 개성과 감정을 가장 잘 살려 번역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영어교육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직역의 좋은 점은 아예 없는 것일까?


직역의 좋은 점


A hot potato

의역으로 이 표현을 ‘골치 아픈 문제’라고만 번역했다면, ‘뜨거운 감자’라는 표현이 한국어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The goose that lays the golden eggs

의역으로 ‘노다지’라고만 했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표현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도가 지나친 직역

'조리법'이나 '요리법'을 "레시피"라고 하는 것

'좋아하는' 또는 '아끼는'이라는 한국말 표현 대신 "페이보릿"이라고 쓰는 것


무작정 영어를 쓰면 폼 난다고 생각해서 영어 표현을 그대로 쓰는 것은 한글을 창시한 세종대왕의 얼굴을 먹칠하는 것이다. 한국어 사랑을 바탕으로 한국어를 아름답게 살찌울 수 있는 영어 표현을 발굴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단어 하나, 영어문법 하나를 공부할 때도 이런 자세로 공부해야 한다. 직역과 의역을 잘 활용해 영어를 공부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무작정 영어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 영어단어와 비슷한 한국단어를 생각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 그 단어와 연관된 나의 어린 시절 기억도 새로 배우는 영어단어에 덧입혀줘야 한다. 


미국인 남편이 나에게 항상 하는 불평이 있다.

"네 영어는 다 좋은데, 감정이 없어. 네가 한국말할 때와는 완전히 달라. 넌 한국말할 때 감정이 넘쳐흐르지만, 영어로 말할 때는 로봇이야."


모국어인 한국어를 무의식적으로 배울 때는 나의 모든 삶이 한국어 공부였다. 일상에서 부딪히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한국어 단어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갔다. 하지만, 영어는 기계적인 암기였다. 그렇기에 로봇처럼 영어를 말할 수밖에 없는 것.


네로와 기남이, 파트라슈와 바둑이처럼 한국적 정서와 개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영어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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