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큰 산이 집뒤에 병풍을 치고 작은 실개천이 집 앞에 졸졸 흐르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집 앞 뒤에는 작은 밭이 있기에 여름이면 밭에서 막 따온 오이, 상추, 고추, 참외, 및 수박을 물 먹듯이 먹었다. 서울에서 사먹던 과일과 야채도 싱싱한 편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이 모든 것은 한국에서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란것을 깨닫지 못했다.
미국 땅덩어리는 무지막지하게 크다. 웬만한 마트에서는 일 년 내내 모든 종류의 과일을 다 살 수 있다. (맛은 별로이지만, 수박과 옥수수를 일 년 내내 어느 때나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매우 놀라웠다.) 하지만 문제는 과일의 신선도다. 광활한 거리를 움직여야 하기에 야채 과일의 신선도가 무척 낮다. 시골 텃밭에서 자란 과일과 야채를 먹고 자란 나에게 미국 마트 과일과 야채는 정말 곤욕이다.
그래서 여름이면 야채는 보통 파머스마켓에 가서 산다.
작년에는 정말 운 좋게 마늘쫑을 발견했다.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반가워 덜컥 사버렸다. 어릴 쩍 간장에 조려 먹었던 마늘쫑 반찬을 생각하며 바로 조리를 시작했다.
비싸게 주고 산거라 하나라도 버리기 아까워 모든 것을 다 잘라 조리했다. 하지만, 실수였다. 간장에 조리고 나니 얇은 대가 너무 빳빳해서 먹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엔 일일이 다 골라내 버렸다.
올해도 파머스마켓에서 조금씩 마늘쫑이 나오기 시작한다. 초기라 너무 비싸 살 수 없었다.
잘못된 영어 단어 학습 원인
작년엔 마늘쫑을 garlic strings라고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붙였다. 끈처럼 생겼기에 string이라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머스마켓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분명 마늘쫑에다 Garlic Scapes라고 이름표가 있었지만 마늘쫑이 너무 반가웠기에 영어 이름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남편 직장 근처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 파머스마켓이 들어선다.
"수요일에 파머스마켓 가서 garlic strings 있으면 좀 사 와"
"garlic strings이 뭔데?"
"내가 작년에 샀던 거 있잖아. 마늘은 아니고, 초록색으로 파처럼 생긴 거야."
"아! garlic scapes!"
그런데 나는 남편의 말을 scraps로 알아들었다. 뭔가 마늘에서 댕강 잘라져 나온 조각이라는 생각에 scraps라고 들은 것이다.
잘못된 영어단어 발음 지적받다
미국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는 미국 친구 킴도 마늘쫑을 좋아한다. 올해는 뉴욕에 있는 어떤 농장과 직거래로 일주일에 한 번 야채를 받는 서비스를 우리 둘 다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받은 야채에는 마늘쫑도 있었는데 겨우 3줄만 왔다.
"난 어릴 적부터 garlic scraps를 먹고 자랐어요. 한국 사람들은 garlic scraps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 먹는데, 피클처럼 해먹기도 해요. 내가 나중에 한번 만들어서 줄게요."
갑자기 내 말을 듣다가 킴은 교실 앞에 있는 화이트보드로 간다. 킴이 칠판에 쓴 것은 "Scapes, Scraps"
"우린 garlic scapes라고 해요."
"어머머! 그렇구나. 고마워요! 전 처음엔 garlic strings인 줄 알았어요. 왜 scapes라고 부르는 거예요?"
"글쎄요... escape이랑 비슷하긴 한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네요."
"이게 마늘 꼭대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서 그런 건가??"
예전 같았으면 발음 지적을 받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부끄러웠을 텐데, 이번에는 오히려 기뻤다. 이제야 마늘쫑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완벽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면서 더 기뻤다.
scape
이 단어는 동사와 명사가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다.
먼저 동사로 쓰인 경우는 escape (탈출하다, 달아나다, 도피하다)라는 단어를 줄여서 쓰는 말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폐어다.
명사로 쓰일 때는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 모양처럼 생긴 것'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고, 식물학에서는 '뿌리에서부터 뻗어 나온 줄기'를 의미한다. 줄기라 하면 stem이라는 단어도 떠오른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garlic stem보다는 garlic scapes라고 부른다. 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stem보다는 scape이 더 정확하기에 그런 듯하다. stem의 어원은 '땅에서부터 솟아 나와 가지를 지지하는 몸통 부분'이다.
마늘쫑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하나를 1년에 걸쳐 몸소 생활하면서 배웠다. 보통 영어단어와 한국말 의미를 일대일 대응으로 외웠더라면 1년이라는 시간은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대일 대응으로 마늘쫑- garlic scapes, 마늘쫑- garlic scapes라고 외웠더라면 garlic scapes가 내 몸과 내 삶에 녹아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서 생각지도 않게 발견한 마늘쫑이 너무 반갑고 고향생각이 나 제대로 영어를 배울 생각없이 그저 내 나름대로 영어단어를 새롭게 만든것이 실수였다. garlic scapes이란 단어는 아직도 마늘쫑이 가진 내 어린시절 추억을 담지 못한다. 마늘쫑 반찬을 군것질 거리로 해서 먹었던 그 추억은 '마늘쫑'이지 절대 garlic scapes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한 단어와 얽히고 섥힌 추억과 역사까지 같이 전달시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국 마늘쫑을 보고 어린 시절 마늘쫑 추억에 감정이 북받쳤다. 이 감정을 garlic scapes만 보고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을 때, 그때 이 단어를 완전히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마늘쫑에서 풍기는 100%의 감정을 garlic scapes에서도 느낄수는 없을것이다. 100%로 완벽한 번역이 있을수 없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것일까.
영어단어를 제대로 배우는 것은 바로 이것과 똑같다.
Hi라는 기초 단어 하나를 배워도 내가 한국말로 쓰는 '안녕,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할때 느끼는 그 감정을 최대한 느끼면서 hi를 쓰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머리로만 배우는 언어는 죽은 언어다. 영어를 아무리 배워도 배워도 늘지 않는 이유는 마음으로 느끼지 않고 머리로만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으로 배우면 실수해도 절대 부끄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