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군가의 동생 Jul 22. 2023

첫 항암, 그리고 응급실

동생의 간암 누나 간병일기

색전술 이후에는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가끔 열이 오르긴 했지만,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이내 금방 가라앉았었으니까. 정말 그때 하루 더 입원하고 온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해열제만 먹다가 방치하고 나중에 일이 커지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으니까. 열은 금방 내려갔었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패혈증은 아닐지 늘 걱정했었다.


누나가 요즘따라 잘 때 입을 벌리고 잔다. 힘이 없어서 입이 벌어지는 걸까? 목이 굉장히 마를 텐데.. 누나가 숨소리도 없이 자고 있으면, 걱정되는 마음으로 가보곤 했다. 설마 말도 없이 간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에, 혹시라도 잠이 깰까 봐 멀리서 목에 대동맥이 뛰는 걸 확인했었다.


이제 조금 살만해질 시기가 다가오니, 다음 외래 날짜가 다가왔다. 누나는 힘들게 4층의 계단을 내려오고, 중간에 가는 길에 조금씩 앉아 쉬기도 했다. 택시를 타면 늘 택시 기사님에게 50~60km로 가 달라고 부탁했었다. 속도가 빠르면 어지러운지 누나가 토를 했었으니까. 택시에서 내리면 일단 토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도 누나의 몸이 아직 회복이 덜 된 건지, 유독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래서 나는 안내 직원에게 혹시 환자가 누울 만한 곳이 없냐고 물어봤었고, 안내 직원은 보안 직원에게 연락하여 환자 이송용 카트를 잠시 내어주었다. 누나는 이송용 카트를 겨우겨우 올라가 누워 잠을 청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걸 극도로 꺼리는 성격이었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망설임 없이 누웠을까?


나는 그런 누나를 위해, 그나마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누나를 데려갔다. 엄마는 누나가 안쓰러운지 계속 머리를 쓰다듬거나, 이불 대신 덮은 잠바를 만지곤 했는데, 나는 혹시나 누나가 잠에서 깰까 봐 그런 엄마를 말리기 바빴다. 나라고 엄마를 말리고 싶었을까, 내 속도 속이 아니었다. 2시간 전에 해야 하는 채혈검사 때문에 이게 늘 일상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교수님을 만나러 들어갔다. 교수님은 현재 척추 이외에 추가 전이된 곳은 없으니,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말했었다. 누나는 추가적인 전이가 없다는 말에 안심을 했던 걸까? 아니면 희망을 가졌던 걸까? 뭐든 상관없었다. 누나의 기분은 좋아 보였고, 다이어리를 적기 시작하더라. 이제 약 개수도 적어져서 먹는 부담도 덜었으니 잘 이겨내 보자!


외래를 다녀온 후 입원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었다. 엄마는 늘 누나가 밥을 안 먹고 누워있으면 옆에 있으면서 한 숟갈이라도 먹으라고 재촉했었다. 가끔 누나는 엄마가 걱정할까 봐 억지로 먹고 토하기도 했었다. 나는 엄마의 걱정이 누나에게 오히려 부담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를 말려봤지만, 쉽게 고쳐지지는 않더라.


누나는 아픈 와중에도 가능한 자주 씻으려고 노력했었다. 초반에는 속효성 진통제인 아이알코돈 1개로도 씻는 동안에 버틸만했었는데, 점점 더 힘이 드나 보다. 눈썹을 그리면서, "나 어떡해... 이제 눈썹도 못 그리겠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하며 울었다. 정말 같이 아파줄 수도 없고.. 이때 너무 속상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누나.. 누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혹시라도 입원일이 밀릴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예정된 입원 날짜에 맞게 연락이 왔다. 마음 같아선 매번 보호자가 같이 입원하는 병실로 배정되길 바랐지만, 이번에는 자리가 없었는지 보호자가 같이 들어가지 못하는 간호간병으로 배정받았다. 아쉽지만 항암치료 시작을 미룰 수는 없으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한 뒤 다음 날 입원을 위해 짐을 챙겼다. 


엄마에게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택시를 탔고,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 어느새 누나의 팔과 다리는 생각보다 많이 얇아졌었다. 몸무게도 너무 빠졌고. 병동 앞에 도착해서 잠시 짐만 정리해 주고 나오려는데,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걱정되는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 동생이 걱정할까 봐 애써 웃는데, 혹시라도 누나가 토할까 봐 근처에 봉지와 휴지를 놓고 나갔다.


돌아와서 누나의 연락을 못 볼까 봐, 핸드폰을 사고 처음으로 알람을 켰다. 그렇게 계속 연락하다가 갑자기 답장이 늦어지길래 매우 걱정했었다. 밥은 조금만 먹어야 할 텐데, 약은 잘 연결해 줬을까, 뭐 하고 있을까, 정말 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모두가 걱정하는 것을 알긴 했던 건지, 누나와 짧게 통화한 뒤에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했다.


입원 당일에는 검사를 하고, 다음날 오전부터 항암 주사를 맞는 듯했다. 언제 끝날지 몰라서 미리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누나가 불러서 얼른 올라갔다. 누나는 이제 곧 끝난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고, 첫 항암인데 주사를 엄청 빨리 맞았다며 말했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건가? 걱정되는 마음은 잠시 뒤로하고, 내가 조사했던 그 신약인지 약물 정보를 확인해 봤다.


다행히 10년 만에 보험이 적용된 신약(아바스틴+티쎈트릭)이었다. 그래도 이전 약(넥사바)보다는 효과가 좋다니까, 누나 정말 다행이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누나가 남은 간은 얼마 없었어도 다행히 남은 간의 상태는 좋은 편이었다. 신약은 간의 상태에 따라 투여 및 보험 여부가 결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신약을 투여했다는 말은, 그나마 최악은 피했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누나에게 잠은 잘 잤냐고 물어보니, 누나는 괜찮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보호자가 없으니 덜 시끄럽고, 나도 코를 안 골아서 깨우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네. 오히려 색전술 시술 때 같이 간 게 다행이었다. 나는 짐을 챙기고 있는데, 간호사가 다른 환자에게 배가 어떻게 아프냐고 물어보는데, 환자가 살살 아프다고 답변하는 걸 보고 누나와 같이 웃었다.


누나는 늘 동생에게 미안하고 고마운지, 뭔가를 사주고 싶어 했다. 퇴원하고 근처 카페에서 원두를 사주려는데, 이미 마감해서 누나가 굉장히 아쉬워했다. 그래도 괜찮다며 얼른 택시 타고 집에 가자고 말했고, 택시 타고 가는데 누나의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지는 게 눈에 보여서 많이 걱정했었다. 집에 오니 엄마랑 아빠가 우리 딸 왔냐며 싱글벙글 웃고 난리였다.


누나는 항암제를 맞고 색전술 때처럼 대부분 누워있거나 잤고, 일어나면 토하거나 잠시 거실에 나와 앉아있었다. 먹는 것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늘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마약성 진통제의 가장 큰 부작용이 변비인데, 누나는 처방받은 액상 변비약이 많이 역한 지 먹으면 바로 토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항구토제를 먹고 먹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지만, 누나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변이 장 내에 계속 있으면 암모니아가 배출되지 않아서 간성혼수가 올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수시로 누나에게 가서 눈 색상을 몰래 확인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팔을 앞으로 내밀어보라고 하기도 했었고. 아무리 내가 걱정되더라도, 누나가 싫다는데 억지로 시킬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안심을 해야 했었다.


내가 옷에 유독 관심이 없어서, 늘 누나가 알아서 옷을 사줬었다. 보통을 할인 상품을 위주로 입었었는데, 누나가 맨투맨 티셔츠가 할인하니까 입을 생각 있으면 말하라고 하더라. 누나는 해당 상품을 이미 입고 있었고. 나는 평소에 거의 무채색 옷을 입었지만, 누나와 똑같은 색상의 옷을 입고 사진을 하나 남기고 싶었다. 누나는 알겠다며 색상별로 여러 개를 주문해 줬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초반에는 해열제로 열이 금방 잡혔었는데, 점점 열이 안 잡혔었다. 특히 열은 밤에 심해졌는데, 처음 38도를 넘겼던 날, 누나가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응급실에 가자고 말했다. 누나는 이내 알겠다고 말했고, 아빠에게 누나랑 응급실에 다녀온다 말하니까 아빠도 같이 가자고 했다. 엄마는 12월 한 겨울에 혹여나 누나가 추울까 봐 내복, 목도리 장갑 등 꽁꽁 싸맸고, 아빠는 혹여나 누나가 추울까 봐 택시를 기다리며 누나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더라.


처음에는 집 근처에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가, 응급실 당직 의사가 항암환자는 원래 다니던 곳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며 우리를 돌려보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아무런 데이터도 없이 고열의 암환자를 받는 것은 큰 부담이었을 테니. 다니던 대학병원으로 가려고 다시 택시를 잡았는데, 택시기사님이 목적지가 응급실이라길래 퇴근도 안 하고 바로 왔다고 말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었다.


대학병원에 도착해서 먼저 인적사항을 적고, 코로나 시국이라 혹시 모르기 때문에 X-ray를 찍으며 대기했다. 아빠는 걱정되는 마음에 계속 우리와 계속 같이 있었고, 응급실 입장이 허락된 이후에는 보호자 1명이 원칙이라 아빠를 돌려보내고 내가 계속 같이 있었다.


응급실에 들어가서는 먼저 응급도를 분류하는 담당 간호사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고,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배정받은 자리는 의자 2개였고, 비록 좁지만 누나가 눕길 바라는 마음에 누나에게 나의 잠바를 덮어주고, 후리스를 베개로 만들어 준 뒤에 계속 서있었다. 힘든 누나를 그 좁은 의자에 눕혀놓는데, 정말 내 마음이 찢어졌다. 이래서 내가 매번 같이 다녔다. 부모의 마음은 나보다 더 찢어질 테니.


다행히 검사 결과는 큰 문제가 없었고, 염증 수치가 조금 있어서 혹시 모르니 항생제를 맞고 퇴원했다. 밖을 나오니 이미 해가 뜨고 있었고, 집에 도착해서 나는 밀린 잠을 청했다. 혹시 몰라서 대학병원에서 사용하는 브라운 체온계를 구입했었는데, 정말 잘 한 행동이었다. 체온계가 아니었으면 지금 몇 도 인지도 모르고 정말 큰일 났겠지.


누나는 평소에 뭘 먹지 못하니까, 꿈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같이 멜론도 먹고, 요구르트도 먹고 그러자. 맨날 힘들었던 이야기 하면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거운 해외여행 이야기 하면서 웃고 그러자. 응급실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누나.

작가의 이전글 치료하는 게 맞았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