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삼과의 첫 만남

(수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

by 불씨

꽤 오래전 일이다. 등산만으로는 지루한 감이 있어 약초산행을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때이다. 산은 언제나 완벽한 준비와 겸손을 요구한다. 깊은 산속은 통신이 불가능하여 전화는 물론, 인터넷, 네이버지도가 화면에서 보이질 않아 무용지물이다. 길을 잃지 낳기 위해 스마트폰에는 통신음영지역에서도 작동하는 오프라인 지도와 GPS 앱을 설치하였고, 미리 확보한 주요 등산로 GPX 파일을 로딩해 두었다. 배낭 속 장비 또한 치밀했다. 멧돼지 조우를 대비한 호루라기, 독사의 공격을 방어할 각반, 진드기와 모기를 막을 해충 기피제, 그리고 치명적인 말벌 쏘임에 대처할 항히스타민제까지. 이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생존을 전제로 한 산악 응급 매뉴얼이었다.


궤도 이탈

하산길, 가파른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속도에 취해 지도를 확인하지 않고 내려오다가 한참만에 보았을때는 내가의 의도한 아래로 향하는 능선 길은 아니였다. 원시림 속에서, 나는 궤도를 이탈해 있었다.

GPS를 확인하니 해발 600미터 지점, 참나무와 낙엽송의 경계였다. 등산로를 찾아 복귀하려던 과정에서 낯선 식생 환경과 마주했다. 남서향 사면으로 오후의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면서도, 참나무와 낙엽송이 혼합림을 이루어 적절한 그늘과 습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공존하며 부엽토층이 두텁게 형성된 이곳은, 약초가 자생하기에 최적의 풍수를 지닌 곳이었다. 경사가 끊긴 약간 평지인데 아래는 절벽으로 올라 올수 없는 언덕위이고, 능선방향은 가시덤불로 접근하기 어려운 지대였다.

길을 잃었다는 공포감 대신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남들이 다니지 않은 숲속을 헤치며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름드리나무 그늘 아래 땀을 식히며 물을 마시려는 그 순간,


첫 만남

혼합림의 적막 속에서 유독 잎의 광택이 다른 개체를 발견했다. 산삼을 처음 보지만 멀리서 봐도, 누가 뭐래도 산삼이였다. 유아독촌처럼 홀로 잡초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후광을 비치며 있었다.

"심봤다." 심마니들의 외침이 마음속에서 메아리쳤으나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경외감 때문이었다. 다섯 가닥의 잎과 줄기의 굵기, 잎의 색을 보니 족히 2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야생삼이었다. 심장이 귓가에서 북소리처럼 울려댔다. 떨리는 손으로 배낭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단순한 채취가 아니라, 자연이 내어준 생명과 마주하는 의식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흙을 걷어냈다. 오랜 세월 퇴적된 부엽토는 부드러웠다. 나무 막대로 주변 흙을 세밀하게 파내려 가자 가늘고 긴 주근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수분을 찾아 깊게 뻗어 나간 뿌리, 그리고 뇌두의 긴 목은 이 생명체가 견뎌온 인고의 세월을 증명하고 있었다. 실뿌리 하나라도 다칠세라 한참 동안 흙과 씨름했다. 손톱 밑으로 검은 흙이 파고들었지만, 그 감각조차 생생한 희열로 다가왔다.

총 길이 90cm에 달하는 거대한 개체였다. 뿌리 길이만 20cm에 이르며, 뇌두의 마디와 몸통의 색상을 보니 수령은 20년에서 30년 사이로 추정되었다. 잔뿌리가 난잡하지 않고 정갈하게 정리된 형태는 산삼 중에서도 중급 이상으로 분류되는 지삼의 특징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천종에 버금가는 야생의 기운이 뿌리의 긴 자태에 응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수십 년간 혹독한 겨울과 가뭄을 견뎌낸 끈기의 결정체였다.


등산과 탐험, 그 경계에 대하여

지삼을 손에 쥐고 나는 등산과 탐험의 본질적인 차이를 사유하게 되었다. "여행은 남이 갔던 곳을 가는 것이고, 탐험은 남이 가지 않은 곳을 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등산이 누군가 닦아놓은 안전한 길을 답습하는 행위라면, 약초산행은 필연적으로 남이 가지 않은 거친 길을 개척해야만 하는 고독한 여정이다.

산삼을 발견하는 것은 확률의 게임이자 행운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행운은 정해진 궤도를 벗어날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내가 만약 GPS 트랙을 맹신하며 정해진 길로만 내려갔다면, 안전한 귀가는 보장되었을지언정 이 고귀한 지삼과의 조우는 없었을 것이다.

역설적인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길을 잃었기에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가시덤불 숲을 헤매는 고통이 있었기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산삼과 조우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귀로의 깨달음

잘 갈무리한 산삼을 배낭 깊숙이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산은 내게 육체적 활력을 줄 약초뿐만 아니라, '방황해도 괜찮다'는 정신적 신뢰를 선물했다.

숲을 빠져나와 다시 익숙한 등산로와 만났을 때, 내 옷은 찢기고 흙투성이였으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길을 잃은 덕분에, 나는 비로소 진정한 길을 찾았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늘 최단 거리, 최적의 경로, 남들이 닦아놓은 '안전한 길'만을 고집한다. 궤도를 이탈하는 것을 실패라 규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산이 내게 가르쳐준 진리는 명확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낙오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입구라는 것이다.


등산은 괘적을 따라 가는 행위다. 정해진 트렉을 따르고, 표지판을 신뢰하며, 다른 등산객의 발자국을 추적한다. 이것은 안전하고 효율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반면 탐험은 창조의 행위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고, 미지의 공간으로 전환하며, 스스로의 판단으로 경로를 결정한다. 수필이나 논문처럼 새로운 것을 찾아 글을 써야한다는 점이 약초산행과 같은 생각을 가끔했다.

현대 사회는 철저히 '등산'의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선배가 밟은 길을 따라가고, 성공한 사람의 이력서를 모방하며, 검증된 방법론만을 신뢰한다. 한국 사회의 교육 시스템이 정답 찾기에 집중하는 이유도, 기업이 레퍼런스를 요구하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이다. 모방은 실패 확률을 낮추지만, 돌파구를 제공하지 못한다.

정해진 길을 따라 걷는 것은 기존 질서를 재확인하는 것이지만, 길을 벗어나 걷는 것은 공간을 재구성하는 창조적 행위다.


세렌디피티는 단순한 운이 아니다. 그것은 예정된 목표를 추구하다가 전혀 다른, 그러나 더욱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견이 '계획의 실패'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궤도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때로는 의도적으로 궤도를 이탈을 즐거워해야 한다. 정해진 목표를 향한 직선 경로가 아니라, 우회하고 헤매며 예상치 못한 것과 우연히 만나는 곡선의 여정이 필요하다.


산삼은 내게 단순한 약초가 아니었다. 그것은 불확실성 속에서만 발견되는 가치의 은유였고, 통제를 포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길을 잃을 용기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진정한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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